한국 재림교회 여성의 과거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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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04.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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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숙 교수 발표전문 ... 미래 여성지도자로서의 비전
소외숙 교수(삼육간호보건대)
미래학자 중 한 사람인 존 나이스비트는 21세기의 키워드(key word) 중 하나가 여성이며 그것은 미래 전략 중 하나가 된다고 하였다. 그만큼 21세기는 여성의 역할이 지대할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다. 그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한국사회에도 여성의 지도자적 사회참여가 국회를 비롯한 사회전반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에 한국 재림교회여성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해보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중에서도 한국 재림여성의 과거를 역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다음 현재 재림교회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진단해 보고자 한다.
먼저, 재림교회가 태동했던 19세기의 여성과 관련된 세계적 추이를 간략히 더듬어보고 그것이 엘렌 화잇과 초기재림교회의 여성들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 재림교회가 한국에 소개된 시점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재림여성들의 활동상을 네 가지 영역, 즉 선교, 교육, 의료, 출판 영역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본 다음 재림여성의 현 위치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I. 재림교회 여성의 과거
1. 19세기의 여성운동과 초기의 재림여성의 활동
여성의 권리 및 지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780년에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 시대였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자유”와 “평등”의 기치 아래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에게는 거의 타부 시 되었던 투표권, 피교육권, 재산소유권 등의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정신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1792년 두 사상가(매리 울스톤크라프트와 존 스튜어트)에 의해 주창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옹호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정신은 미국에 계승되어 1830년대의 노예폐지운동과 더불어 1840년대에 본격적인 여권신장 운동으로 발전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는 그 당시의 교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선봉으로 나선 것이 감리교회였다. 1853년 감리교회는 세계 최초의 여성 안수목사를 탄생시켰다. 엘렌 화잇도 바로 감리교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재림교회 태동시에 여성으로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가 특별한 예언적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 외에도 여성의 활동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던 당대의 사회적 조류가 크게 한 몫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렌 화잇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복음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여성 복음사역자들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절실히 필요하다”(복음사역자, 493)고 함으로써 복음사역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조류와 화잇을 통한 하나님의 권면에 힘입어 초기 재림교회에는 여성의 참여와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1871년부터 1883년 사이에 여성이 대총회 재무로 근무하였다는 사실은 그 당대의 여성의 역할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림교회가 한국에 상륙한 초창기의 재림여성의 역할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2. 초기 한국재림교회의 여성 선교사들의 활동
최초로 한국에 파송된 여선교사는 1907년에 내한한 23세의 샤펜버그(Mimi Scharffenberg)였다. 그는 그 당시 최초의 재림교회 학교였던 의명학교의 여자부 책임자, 안식일학교 주임, 월간지 편집인으로, 그리고 예언의 신 번역 출판 등으로 매우 중요한 일들을 감당함으로써 초기 재림교회에서 여성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08년에는 스캇(Helen May Scott)이 의명학교와 경성요양병원의 여사감으로서 그리고 문서전도에서 헌신적으로 수고하였다. 1909년에는 샤펜버그의 동생이며 왕아시 목사의 부인인 왕대아(Theodora Wangerin)여사가 경산지방에서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으며 남편이 사별한 후에 다시 내한하여 안식일학교부장, 청소년부장 등을 역임하는 등 일찍이 여성으로서 그 중요한 직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특히 1927년에는 재림교회 역사상 최초의 가정위원회 위원장이 됨으로써 여성 및 가정사역의 초석을 놓았다.
한국 재림교회의 초창기에, 다시 말하면 아직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인식이 매우 유교적이었던 그 시절에, 여성들이 이러한 괄목할만한 일들을 했다고 하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 당시의 선교사들이 여성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한 일을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녀평등에 대한 그들의 문화적 인식도 그러했겠지만 그것은 이미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녀가 남자에 대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가지지 않고 모든 면에 그녀는 평등하도록 계획하셨다”(교회증언, 3권 484). 평등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될 것이다. 특별히 교회사업에 있어 여성의 역할도 그러할 것이다.
3. 초창기에서 현재까지 한국재림교회여성들의 활동들
여성들의 활동영역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네 가지 영역에 국한하여 말하려고 한다. 즉 그들의 선교사역, 교육사업, 의료사업, 그리고 출판사업 등에서의 참여이다. 김재신 목사의 “한국재림교 여성 100년사 소고”에 소개된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려고 한다.
(1) 선교사업과 여성 활동
임기반에 의해 진남포에서 시작된 선교사업(1904년)에서 재림기별을 받아들인 사람은 총 36명이었는데 그 중 성인여성이 14명이었다고 한다.
특히 이 여성들 중 이성일은 1905년 한국교회 첫 여성전도부인으로 선임되어 교회가 해산될 때까지 약 38년간을 여성교역자로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1910년에는 한국 선교지역을 4대 권역으로 나누었는데, 이 때 봉사한 여성사역자로는 이성일을 비롯하여 임창신, 류창선, 김유덕, 강영신 등이 전국 4개 지역으로 배치되었다.
그 당시 남녀가 자유롭게 대화하거나 합석하는 것이 여의치 않던 시대에 이들 여성사역자들이 있었기에 금남의 성이었던 여성들에게 마음껏 전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여성들만이 할 수 있은 고유영역이 된 셈이었다.
초창기 여성지도자의 필요를 공감하고 여성들을 위한 교육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의명학교와 경성삼육원에서 해마다 여성 졸업생들이 배출되었다. 적게는 6명에서 많게는 22명까지 매해 재림교회 교육기관을 통해 졸업한 여성들이 선교일선에서 열심히 봉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역할이 결코 미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총회 참석자 수에서 이를 입증한다. 일본합회로부터 독립하여 단독으로 조선합회로 창립되던 1919년 총회에 67명의 대표자가 참석했는데 이들 중 여성대표가 7명이었다는 사실(약 10%)은 그 당시의 사회적 여건과 관습으로 볼 때 대단한 것이다.
또한 해방 후 개최된 신도대회에서도 146명의 대표자들 중 14명이 여성이었다(약 10%). 이런 점에 비춰볼 때 한국연합회 총회나 행정위원회 등의 위원회에 여성대표자의 참여수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앞선다.
다시 말하면, 남녀가 유별하다던 그 시대였을지라도 한국재림교회의 초기역사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2) 교육사업과 여성 활동
여성선교사들의 활동에 힘입어 여성교육 또한 활기를 띠었다. 그런 가운데 한국재림여성 교육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47년에 시작된 경성삼육원에 이화여전 출신의 임정혁 선생이 여교사로 부임해 기숙사 여사감 및 가사, 영어교사로 활동하였다. 그 이후로 현재의 삼육대학교의 전신인 삼육초급대학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여성으로서 임정혁 외에 김기춘, 한영옥, 그리고 손경숙 등이 교육사업에 동참하여 교육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재림교회 여성교육자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재현 집사는 1963년에 동성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여성교육자로서 헌신하였다. 그는 1956년에 원광회를 만들어 장학사업 및 탁아사업을 시작했고, 1960년에 광주보육원을 시작하여 원아들을 돌보는 복지사업을 하였다.
그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회참여를 통하여 새싹회 표창(1965), 하남시 교육부문 문화상(1991), 그리고 경기도 문화부문 여성상(1998) 등을 수상하여 재림교회여성의 사회적 헌신과 봉사심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평생교육자로 헌신한 송숙자 박사도 대통령 표창인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1998).
이 외에도 상당히 많은 수의 재림여성들이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고 일부는 초중등학교의 교장으로서 그 분야의 탁월한 일꾼들이 되고 있다.
(3) 의료사업과 여성 활동
많은 활동 중에서도 재림여성들의 의료사업에서의 활동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최초의 선교사들 중 상당수가 간호사들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순안병원에 근무한 여성 간호사는 의명학교 출신의 이진실이었다.
그 후 중국 상해요양병원에서 정식으로 간호교육을 받은 임신일이 1917년에 간호사로 부름 받은 첫 여성간호사가 되었다. 이 요양원에서 정식으로 간호교육을 받고 간호사 자격을 획득한 여성들로는 김유순, 박근실, 박봉순, 윤순희, 그리고 노보신 등이다. 그 외에 만주 봉천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된 여성으로는 장근복 등이 있다.
그러나 한국재림교회 최초의 간호사 양성기관으로는 1936년에 세워진 경성요양병원 부속인 간호사 양성소로서 현재의 삼육간호보건대학의 전신이다. 이 대학을 통해 배출된 부지기수의 간호사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여성 간호사들 중 특기할만한 것은 노보신, 안귀분 두 간호사가 그들의 헌신적 봉사가 귀감이 되어 간호사 최고의 영예인 나이팅게일 휘장을 받았다. 또한 간호사들 중 여러 명이 해외로 진출하여 선교 간호사로서의 역할을 잘 해주었다.
(4) 출판사업과 여성 활동
재림여성의 활동은 출판사업에 있어 특히 두드러진다. 일찍이 왕대아 여사는 시조사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출판사업에 대한 여성 활동을 예고한 셈이다.
안타깝게도 왕대아 이후로 여성의 대가 이어지지 못했지만 1909년 이후 여성들의 문서사업 참여는 결코 적은 일이 아니었다. 1910년의 기록에 의하면 상당수의 여성문서전도자들이 남성 교역자들과 함께 함경도에서 부산에 이르기까지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하였고 1926년에 여성 문서전도자가 판매고 2위를 차지했다는 당시의 기록은 출판사업에 참여한 여성의 활동이 어떠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5) 구호봉사사업 및 여성 활동 조직
II. 재림교회 여성의 현재와 진단
1. 재림여성의 현실적 진단(개인적 차원)
1) 자신의 정체성 부족
- 각종 예배시간, 기도주일, 교회행사에 대한 시간의 우선순위
- 자녀교육, 자녀진로를 위한 성경과 예언의 신 적용
- 자신의 사명과 가정, 교회, 국가의 관계형성
2) 자신의 은사(달란트) 계발 부족
3) 자신의 봉사를 위한 창의성 부족
4) 자신의 조화 있는 그리스도인 성장 부족(눅 2장 52절)
2. 재림여성의 현실적 진단(교단적 차원)
1) 재림여성 인력개발 전담부서의 부재
2) 다양한 봉사영역을 위한 지속적 교육프로그램의 부재
3) 다양한 봉사와 교육을 위한 상징성 전문공간의 부재 4) 다양한 직장여성들의 보직, 승진, 복지혜택의 차별화
5) 여성들의 교회를 위한 건전한 정책참여 부재
6) 여성구도자를 위한 여성목회자 채용의 차별화
III. 결론
선교 100주년을 맞은 한국 재림교회의 17만 교인 중 약 70%가 여성들이다. 재림여성들의 가치는 한국재림교회 최고의 무형자산이며 최상의 활동에너지일 것이다. 현재 여성들의 활동은 양분화 되어있는 듯 하다.
첫째는 전문직 여성들의 활동영역으로서 교사, 의사, 간호사, 약사, 교사, 보건전문직등이며, 이들 대부분은 선교중심보다는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째는 여성봉사의 다수를 이루는 교회집사들로서 주로 봉사와 선교일원으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이러한 시스템으로서는 자라나는 청장년들을 흡수하기에는 심히 역부족이다. 다양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은사들을 캐내고 갈고 닦아 다양한 개성들을 연합하여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이루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다행히 1997년에 신설된 여성전도부를 중심으로 5개 여성협회가 조직되어 활발히 움직이고 있으나 현재 남성선교부장이 여성전도부를 겸임하는 환경에서 재림여성의 막대한 보고를 캐내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활발히 선교사업에 참여하는 소수의 정예집사들이 선교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상황들을 교회선교에 연결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회직원회를 비롯한 합회행정위원, 연합회 행정위원회 등에 참여하는 여성의 수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의사가 원활히 반영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도층의 현명한 식별력과 선각자적인 제도적 뒷받침 없이는 재림여성의 과거와 현실을 가늠하는 오늘의 노력이 무산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제 재림여성들은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본 대로 초창기 재림여성 선각자들의 사명과 헌신과 참여를 우리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가능성을 은 더욱 힘껏 다지고 우리의 농축된 재능을 성령의 불로 달구어서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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