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술람미 뮤지컬 ‘바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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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람미 뮤지컬컴퍼니의 신작 <바벨>이 지난 10일 막을 내렸다.
“무거운 짐을 진 자 바벨을 오르네. I'm late. I'm late... 올라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라가. 올라가”
사실은 시작부터 우울 그 자체다. 영상 속에는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고 오르고 또 오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공연장 세트로는 거대한 시계만이 좌우에 존재감 있게 배치돼 있을 뿐이다.
“멈춰 버린 시계는 아무도 찾지 않아. 그러니 아픈 숨결 감춰. 태연히 고개 들어”
귀를 장악하는 합창은 또 어떤가. 우울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며 마침내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시계로 우리 눈과 귀를 가려 버린다. 안 그래도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 세상인데...
작품은 C. S 루이스의 소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테츠 창의 단편 <바빌론의 탑>을 오마주했다.
공연은 바벨탑만큼이나 거대하고도 끈질긴 악마의 유혹으로 시작한다. 악마는 신이 있는 하늘까지 바벨탑을 세우고, 그의 영역에 도달하기만 하면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인간을 속인다. 우리를 만드신 신을 믿지 말고 그의 영역을 침범하라고 계속해서 부추기고 채근한다. 시작부터 우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단순한 악마의 꾀임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현대사회를 여실히 보여 주는 거울인 것만 같아서.
작품은 시기와 욕망의 현대사회를 학교라는 공간으로 재설정해 바벨 시대의 혼돈에 빗댄다. 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인간의 실수는 어쩌면 작은 교실 안에서부터 배워 왔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타인과 경쟁해야 하는 학생들의 모습으로 우리가 세워 온 ‘바벨탑’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악마 ‘스크루’와 ‘테이프’는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탑을 세우도록 유혹하는 것이 인간들을 신과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신입 악마들을 교육하는 컨설턴트다. 인간들의 불안을 자극해 탑을 쌓도록 유혹하고 무너뜨리라 가르친다.
그들의 계획대로 학생들의 마음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하다. 하고 있어도 더 해야 할 것만 같고 누군가를 눌러야만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을 끊임없이 불어넣는다. 자기들의 힘으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려는 마음을 품은 이들이 결국 하루하루 침몰하도록, 교만과 불신의 굳건한 다리를 건너 마침내 신으로부터 멀어지고 다시는 신과 닿을 수 없는 나락으로 인간을 떨어뜨리려 한다.
때마침 한 아나운서가 방송에서 이야기한 ‘문턱증후군’이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진학에서 취업까지 험난한 경쟁의 문턱을 넘어 간신히 숨을 돌리고 있는 청춘에게 또다시 다음을 준비해야 하니 운동화끈을 고쳐 매라고 압박하는 게 요즘 사회”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렇게 쉼 없이 달리기만 하다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바벨탑을 세우고 있었다. 교실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사회에서, 내가 뱉은 숨에서, 내가 던져 버린 시선에서 누군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 적은 없었던가 돌아보게 된다.
우리 중 누구라도 교실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은 적은 없다. 배우기 위해, 자라기 위해 앉아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누군가를 이기려고, 밟고 올라서려고 그렇게 끈질기게 앉아 있었던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누구나 교실 속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학창시절 기억까지 더듬어 떠올리지 않아도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 역시 가시밭길 그 자체다. 거대하지만 투명하고, 단단하지만 만져지지 않는 바벨탑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바벨탑은 아주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인 것이어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교실 속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갈등은 악마들의 계획에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악마의 계교를 그냥 두실 리 없는 신께서는 그들의 계획마저 역이용해 사람을 살리셨다. ‘행복하니?’라는 질문 하나로 인간은 궁극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 없이 참된 행복이 없다는 것,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분 옆에 와서 쉬는 것임을 마침내 깨닫게 하셨다.
‘그때 한숨은 기도가 되고 무너지며 꿇은 무릎은 은혜가 되었어. 마침내 하늘의 평안을 찾은 그날, 한숨은 그제야 기도가 됐어’
세상에서는 ‘다시’라는 말을 배운 적 없지만, 그분은 언제라도 몇 번이라도 ‘다시’ 해도 된다고 말씀하신다. ‘다시’ 해 보자고, ‘같이’ 해 주겠다고 하신다. 과거가 어떻든 몇 번을 넘어졌든 ‘다시’ 하면 된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다만 우리 마음에 세우고 있는 ‘바벨’은 무너뜨리라 하신다. 인간이 만드는 그 무엇도 우리를 높아지게 할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없고 진짜 행복에 다다르게 하지 못한다고 가르쳐 주신다.
“진짜 하늘에 닿는 방법은 탑을 쌓는 게 아니야. 무거운 짐을 지고 하늘까지 올라오라고 하지 않으셔. 올라가 봤지만 결국 땅바닥이었어. 진짜 하늘이 이 땅에 내려오셨어”
내가 넘어질 때, 나도 모르게 악마 편에 서 있을 때 예수님은 ‘나의 사랑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신다.
세트장 대신 준비한 배경은 모두 자체 제작한 영상이었다. 멋지고 웅장하고, 평온한 여러 장면이 있었지만 공연 막바지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한 사람의 표정이 마음에 박혔다. 그게 결코 타인인 것 같지 않아서. 압박감에, 불안감에,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슬픈 표정으로 바벨을 걸어올라가던 그의 표정이 말했다.
“너의 인생은 너를 창조하신 분께서 책임지실 거야. 두려워하지 마”
공연은 ‘I'm late’로 시작해 ‘I'm free’로 마무리됐다.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뮤지컬 ‘바벨’은 예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갈 5:1)
술람미는 ‘평화’라는 뜻이다. ‘솔로몬이 지극히 사랑한 여인’이기도 하다. 솔로몬은 지혜의 상징이며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다. 그렇다면 ‘술람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사랑하는 ‘재림성도’인 셈이다. ‘술람미의 계절’은 지나가고 있지만 ‘술람미의 정신’이 재림성도 마음에 번지고 새겨진다면 매일이 술람미의 계절이 아닐까? 우리는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술람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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