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120주년 기념] 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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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님, 성산포 다녀오셨어요? 그 기사 엄청 자세하게 읽었어요. 제가 피난교회 출신이거든요”
전혀 알지 못했다. J 집사님과 매 안식일은 물론 화요일과 금요일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그가 제주도, 그것도 피난교회 출신이란 것을. 그리고 <재림신문>의 기사를 한 자 한 자 정독하는 열혈 독자라는 점도.
평소에도 교회 로비에 비치된 <재림신문>을 가져다 읽는 모습을 본 적은 있었지만, 기자는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이기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로만 ‘가벼이’ 생각했다. 그런데 피난교회 출신이라니! 이런 인연이 있을까. 어쩌면 기자가 피난교회 취재를 다녀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쭉 모른 채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피난교회는 되찾을 수 있는 거예요? 저한테만 살짝 스포일러 해 주세요. 어디 가서 절대 말 안 할게요”
기사를 꼼꼼히 읽는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 미리 귀띔해드릴까 싶었지만, 드라마도 ‘본방 사수’가 제일 재밌는 것이라며 기사로 기다려 주십사 당부드렸다. 사실은 취재 내용을 옮기는 과정에서 아직 마음속에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에 그리 말씀드린 것이다. J 집사는 다소 아쉬움이 묻은 얼굴로 피난교회 기사 보러 교회에 더 빨리 와야겠다라며 “잘 부탁한다”라고 인사했다.
한번은 몸이 으슬으슬해 감기약을 먹고 선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갑자기 휴대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직업이 기자인지라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자의 기사에 대해 문의하는 전화일 수도, 제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C 장로라고 밝힌 상대방은 피난교회 기사를 흥미롭게 읽고 있다며, 피난교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어 전화했다고 했다. 소파에 누워 있다 일어나 허리를 펴고 앉았다. 탁자에 놓여 있는 메모지에 그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휴대폰의 열기가 오르는 것 이상으로 C 장로의 목소리가 뜨거워졌다.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궁금한 것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이 번호로 전화를 주십시오. 내가 식사라도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라는 말씀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이뿐 아니다. 수많은 독자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피난교회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리고 모두 한 마음으로 피난교회를 되찾는데 힘이 되고 싶다고 했다. 피난교회와 인연 맺는 시간의 길이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피난교회라는 공간과 그 안에 함께 했던 사람과 그 위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Gabriel Garcia Marquez)라는 소설가가 있다. 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사조의 선봉에 선 그는 기자 출신으로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런데 상을 받은 얼마 후, 그의 대표작 <백 년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과 관련해 신기한 편지를 받았다.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나는 평생 동안 숨기고 살아왔는데, 노벨문학상을 받은 훌륭한 작품에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돼지꼬리를 당당하게 밝히게 됐다며 감사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르케즈는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수십 통 받았다고 전해진다. 글이 가진 놀라운 힘을 보여주는 일화로 출판계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기자가 피난교회에 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해 제주대회 창립총회 현장에서다. 삼육대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가 경영위원회에서 “이제라도 피난교회를 되찾아야 한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기자가 직접 제주도까지 찾아와 취재를 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취재한 내용을 <선교 120주년 기념: 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라는 제목으로 연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르케즈가 쓴 이야기가 마술처럼 작용해 돼지꼬리를 갖고 태어난 이들이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처럼, 피난교회가 단지 그때를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한국 재림교회 성도들의 의식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도 피난교회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에 그친다면 피난교회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943년 10월 28일,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하원의 재건축을 논하는 회의에서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우리는 건축물을 짓지만, 그 이후로 그것은 우리를 짓습니다”라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말로 정리돼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기자는 피난교회를 되찾아야 할 명분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 근대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오히려 제주도 복음화의 기회로 삼으셨던 하나님,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켜온 우리의 선배 신앙인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든 곳이 바로 피난교회이며, 이 공간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신앙을 전수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장 계획을 세우고, 사전 취재를 진행하던 당시부터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피난교회 유적지화’ 였다. 그리고 현장 취재를 통해 문화재 등록에 관해 알게 됐고 그 후로 ‘피난교회 문화재 등록’이라고 명명해 왔다. 문화재 등록을 목적으로 삼은 이유는 다름 아닌 경제적 비용 때문이었다.
피난교회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 보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서귀포시청과 세계유산본부 등 관계 기관을 찾아가 취재한 결과 비용을 전혀 들이지 않고 피난교회를 보존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재 피난교회 건물 소유주가 교인이 아니라는 점도 이를 더욱 요원하게 하는 이유였다. 오히려 주무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그 이후 절차는 수월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우리가 나서야만 하는 것이다.
피난교회를 기념관으로 보존하려 했으나 도시 계획상 철거가 불가피하다며 계획을 취소했던 것이 1989년이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변에 새 건물이 들어설 때도 피난교회는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버텨왔다. 하나님의 개입하심 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이제는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할 때다. 우리의 결정만 있다면 피난교회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1951년 성도들은 그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피난교회를 지었다. 이제 피난교회가 우리와 다음 세대의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보존하는데 더욱 뚜렷한 결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 이 기사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의 지원으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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