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화마가 할퀴고 간 동해 박의현 장로 전소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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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4.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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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여 가꾼 전원주택 한순간에 잿더미로 ... 11월 美 전시회 앞두고 ‘막막’
그러나 옥계 톨게이트를 나서자마자 거대한 숯덩이처럼 검게 그을린 산야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그림자인지 불에 탄 나무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 산등성이 대부분이 시커멓게 타 버렸다.
백봉령 방면으로 핸들을 틀어 약 6Km 남짓 더 들어갔다. 논밭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손을 부지런히 펼치는 농부들 사이로, 어디론가 바쁜 걸음을 옮기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군데군데 이재민들을 위로하는 현수막과 함께 구호품이 쌓여 있다.
<재림마을 뉴스센터>는 지난 18일, 강원도 동해시 옥계면의 박의현 장로 가옥 전소 현장을 찾았다. 그는 동해중앙교회와 합병하기 전까지 옥계예배소를 섬기며, 자급사역자로 교회를 지켜왔던 평신도지도자다. 이번 산불로 20여 년 동안 애써 가꾼 전원주택을 잃었다. 여기에 직접 그린 미술작품 약 500점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재산피해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집이 서 있던 자리는 흔적만 남았다. 폐허 상태 그대로다. 만약 주소가 없었더라면 이곳이 화재현장인지, 그냥 공터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불이 난지 2주나 흘렀지만, 검게 그을린 흙을 밟을 때마다 먼지와 함께 매캐한 탄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이 동네를 덮친 후 인근의 망상으로 넘어갔다. 불덩이가 파도처럼 꼬리를 치고 넘나들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만 12채가 전소됐다. 박 장로는 기둥까지 다 타버린 집을 보면서 재림의 순간, 유황불에 타버릴 죄악 세상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림처럼 예쁜 집을 병풍처럼 감싸 안았을 뒷산은 온통 먹물을 뿌려놓은 듯 시커멓게 변했다. 나무들은 흑백사진처럼 앙상한 실루엣만 드러냈다. 울타리를 대신해 집안을 휘둘러 감싸고 있던 대나무숲은 잔인하게 허리가 꺾인 채 검게 타 휘어져 있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는 마치 화상에 피부가 벗겨진 것처럼 속살이 다 드러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웠다.
푸른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있던 정원엔 재가루가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고향집처럼 푸근하던 황토 기와집과 작품을 소장해 두었던 작업실이 이젠 형체도 남아 있지 않다. 개울의 돌덩이마저 까맣게 타버렸다. 인적마저 뜸한 마을엔 이름 모를 새소리만 정적을 깨웠다. 이 모든 게 하룻밤 사이 일어난 일이라는 게 언뜻 믿기지 않았다.
피해와 아무 상관없는 기자가 보기에도 기가 막히고 황망했다. 박 장로는 10여년 전만해도 화재보험에 가입했었지만, 최근 여러 사정이 겹치며 그나마도 중단한 상태에서 재난을 당해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도 그는 감사의 조건을 찾았다.
“평소 같으면 여기서 잤을 겁니다. 원래도 그냥 집에서 자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인이 만나자고 해서 시내에 나갔다가 부득이 일이 늦어져 밖에서 자게 된 거에요. 만약 여기 계속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죠. 하나님께서 저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정말 감사해요”
그날 밤, 그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핸드폰에서는 계속 재난문자가 울렸다. 초조하게 뉴스를 보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불길 속에서 제발 집과 작품을 지켜주시길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자식처럼 그린 소중한 그림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튿날 새벽같이 달려왔다. 경찰과 소방관들은 마을 입구부터 통제했다. 그러나 기도와는 달리 처참하게 변한 잿더미에서 하얀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무했다. 순간적으로 ‘이게 과연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응답인가!’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곧 ‘이것이야말로 기도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번 화재를 겪으며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신 분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고 했다.
“만약 나의 바람대로 우리 집만 피해를 입지 않고 건너뛰었다면, 그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닐 겁니다. 그건 이기심입니다. 나뿐 아니라 주변의 이웃들이 모두 다 막대한 피해를 입었거든요. 나도 그들과 함께 어려움을 나눠야 합니다. 그게 ‘공평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고통을 그들과 나누어 짊어지기를 원하신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워낙 애정을 쏟은 집이었기에 처음엔 가슴이 무척 아팠다. 이곳에 내려오기만 하면 늘 행복했던 보금자리다. 포크레인이 잔해를 치우는 장면을 보면서 한동안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때론 꿈을 꾸는 듯, 아니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추슬렀다. 불이 난 자리에서 새싹이 자라는 걸 보면서 다시 용기를 얻었다. 비가 오고 푸른 풀이 덮이며 화재의 기억이 지워지는 듯했다. 재난의 한 가운데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됐다.
“마음을 비우니까 어느 순간 괜찮아지더라고요. 이런 계기를 통해 신앙적으로나 생활면에서 성숙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고 여기기로 했습니다. 이 또한 하늘가는 여정길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에너지가 어느 정도인지도 가늠해 볼 수 있고요. 지금까지 제 삶을 되돌아보면 주님은 늘 내 편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 서서 일하고 계신다는 걸 믿기 때문에 염려와 걱정은 접어두었습니다”
화재 이후 박 장로는 마을 노인정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지난 17일 정부가 임시로 마련한 강릉의 한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온 게 없어 구호품으로 지내야 한다. 그나마 노인정에 있을 땐 자원봉사자들이 식사를 대접했는데, 이곳으로 오면서 끼니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게 됐다. 냉장고나 세탁기가 없어 음식물 보관과 빨래가 여간 고생스러운 게 아니다. 가스렌즈도 연결되지 않아 도시가스 업체 관계자를 기다리는 중이다.
강릉에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도 기약할 수 없다. 다시 집을 지어야 할 때까지 살아야 하는데, 그게 기한이 없다. 차후 대책도 미지수다. 정부가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접수했지만, 언제부터 복구를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없다. 뾰족한 대책이나 해결방안이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보상도 현재까지는 지지부진하다. 간간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은 현실성이 적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국가에서 얼마의 지원은 있겠지만, 다시 집을 짓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워낙 피해지역이 넓고, 규모도 크니 어쩔 수 있나요. 나야 집 한 채지만, 어떤 이들은 건물이나 공장이 전부 불에 탄 사람도 있는데... 막막한 상황이지만, 기다려 봐야죠”
박 장로에게 지금 당장 급한 건 자금이다. 특히 미술도구와 재료 마련이 시급하다. 오는 11월 미국에서 전시회가 계약돼 있기 때문이다. 최소 30점은 출품해야 하는데, 이번 화재로 어느 것 하나 남지 않았다. 전시회를 취소해야 할지, 지금부터 부지런히 그려 최소한의 작품이라도 가져가야 할지 여간 고민되는 게 아니다.
중견 화백인 그는 버진아메리카 국제작가협회의 한국지회장을 맡고 있다. 화재 복구와 보상 때문에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닌데, 전시회까지 겹쳐 마음이 조급하고 바쁘다.
그럼에도 그는 용기와 희망을 본다. 특히 국내외에서 생면부지의 성도들이 보내주는 따뜻한 정성에 눈물이 날만큼 고맙다.
“많은 분들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며,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분들이 성금을 보내주셔서 여간 죄송하고 고마운 게 아닙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인터뷰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실의에 빠져있는 저와 가족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구호품을 받으러 가야 한다며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면서 예기치 않은 재난을 겪고 괴로워하는 피해지역 주민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상황은 막막하고 암담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헤쳐 나가야죠. 이번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더욱 성장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진리를 모르는 분들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해 성도들이 기도해 주십시오”
그가 떠난 자리에 파란색 조끼를 맞춰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장비를 챙겨들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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