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거와의 대화 ... 사용승인일자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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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의 네트워크는 그 어떤 단체보다 끈끈하고 효율적이었다. 성산포 피난교회의 역사성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을 수소문하자 금방 20여 장이 날아들었다. 피난교회를 취재하며 또렷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 많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저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누렇게 빛바랜 사진들이 기자의 손에서 50년 전에도 피난교회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진의 귀퉁이는 닳아서 뭉툭해졌고, 살짝 구겨진 부분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기자가 DSLR 카메라로 찍은 어떤 사진보다 생생했다. 전도회를 마치고 한자리에 모인 성도 너머로 “돌 하나하나에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이 스며들어있는 교회당”(오만규 저, 한국 재림교회 100년사, 112p)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침례식을 가진 뒤 성산 일출봉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들어 창밖으로 보이는 일출봉과 비교해 보았다. 7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일출봉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은 바뀌고 마을은 발전과 쇠락을 반복했지만, 일출봉의 웅장한 자태는 그대로였다.
“남자들은 어깨에 돌을 들쳐업고, 여자들은 치마폭에 모래를 담아 나르며 교회당을 지었어요”
강관규 수석장로와 한공숙 장로, 부금현 집사(이상 성산교회) 그리고 김태자, 장광자, 현춘홍 어르신 등 피난교회의 건축과정을 알고 있는 분들의 공통된 증언 중 하나였다.
인터뷰 때마다 들었던 말이기 때문일까. 간밤의 꿈에서도 등장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사진으로 접하니 가슴속이 묘하게 뜨거워졌다. 어쩌면 사진에 담긴 더운 여름날의 풍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진 속 성도들이 흘린 비지땀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또한 그들의 헌신으로 이곳 성산포 일대에 재림성도들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사진을 종이로 고이 싸고, 봉투에 넣어 취재가방에 챙겼다. 그리고 베이스캠프인 성산교회 사택에서 나와 읍내로 발을 옮겼다. 제주에 도착한 후로 아침저녁으로 피난교회를 보러 가는 것은 일과가 됐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피난교회를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지든지, 다시 힘을 내보든지 긍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피난교회 건물에 어떤 주술적인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임을 잘 알고 있으며,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다. 피난교회를 바라보는 일은 그 모든 일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성산 일출봉과 침례식 사진을 겹쳐 보았던 것처럼, 취재가방에서 사진을 꺼내 식당이 된 피난교회와 겹쳐 보았다. 비록 식당 간판이 세워지고 울타리가 생기긴 했지만, 교회당 건물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일출봉이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며 역사의 순간들을 간직하고 문화재로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피난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재림성도들의 삶과 헌신, 그리고 성산포 일대에 끼친 선한 영향력 등 온갖 역사를 끌어안고 서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피난교회도 문화재로 인정받아야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어쩌면 피난교회는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말을 걸어왔지만 우리는 이제까지 대화를 피해왔는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카의 말에 비춰 생각해 본다면 피난교회가 역사가 되고 문화재가 되는 길은 당사자인 우리가 피난교회의 대화에 응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피난교회가 1951년에 지어졌음을 증명하는 문헌을 찾아야 한다. 정부에서 발행한 문서가 가장 확실하겠지만, 만에 하나 필요할지도 모르니 교회직원회 회의록이라든지, 호남합회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 교회 쪽 문서는 강관규 장로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그리고 기자는 성산읍사무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읍사무소는 청사 신축공사 때문에 인근 체육관에 임시로 공간을 마련하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체육관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닥에서 나무 특유의 삐거덕 하는 소리가 났다. 번호표를 뽑고 잠시 기다렸다.
체육관은 햇빛이 들지 않아서인지 바깥보다 한결 쌀쌀했다. 기자의 차례가 되고 창구에 가서 말했다. “고성리 327-3에 위치한 건물의 등기부등본을 뗄 수 있을까요?” 주무관은 친절한 미소와 목소리로 “빠르게 도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음이 놓이는 말이었다.
“이 건물의 소유주이시거나 임차인이신가요?”
무언가 잘못됐다 싶었다. 마음을 놓기가 무섭게 일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이런 예기치 않은 상황은 전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기자가 이곳에 발을 들이기 전에 기도를 했던가? 성산읍사무소 주무관의 설명에 따르면 등기부등본은 부동산의 소유주나 임차인만 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자는 둘 모두 해당사항이 없기 때문에 등기부등본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소유주나 임차인이 아니지만 등기부등본을 열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문의했다. 그러나 원칙은 원칙이었다.
기자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주무관이 상급자에게 가서 귓속말로 이야기를 하고 그 상급자는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기자를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등기부등본은 포기하고, 혹시라도 피난교회 도면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시 창구에 찾아가자 주무관이 경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성리 327-3에 위치한 건물의 도면을 열람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부서가 다르다며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저분께 가시면 도움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도면이요? 그 당시 도면이 과연 있을지 모르겠네요. 전산상으로는 등록된 게 없고요. 혹시 모르니 잠시만 기다리시면 찾아보겠습니다”
주무관 책상 옆 접이식 의자에 앉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주무관의 손에는 도면 대신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따뜻한 둥굴레차였다. “추워보이셔서요. 그런데 도면이 왜 필요하신 거예요?” 기자는 차를 받아들고 서귀포시청과 세계유산본부에서 했던 이야기를 주무관에게 들려줬다.
“좋은 일 하시네요. 안타깝게도 도면은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 같네요. 그런데 혹시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요. 여기 한 번 보시겠어요?”
주무관이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킨 손끝에 네 자리 숫자가 보였다. ‘1951’ 잠시 시간차를 두고 기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숫자는 바로 피난교회의 ‘사용승인일자’였다. 월과 일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피난교회가 1951년에 지어졌음을 정부가 확인해 준 것이다. 감사인사를 전하고 임시청사를 빠져나왔다. 그 순간 기자의 휴대전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계유산본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곳에서 만났던 주무관의 상급자인 듯했다.
“기자님 저희 주무관으로부터 말씀 들었습니다. 해당 사안에 관련해서는 저에게 바로 연락 주십시오. 빠르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제주의 오후 햇살은 유난히 눈부시게 반짝였다.
* 이 기사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의 지원으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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