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베를린 장벽 무너뜨린 니콜라이교회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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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8.05.20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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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만큼 작게 시작한 사역이 역사적 평화혁명으로
이것은 1983년 당시 동독의 작센주 북서쪽에 위치한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교회에 모인 청년들이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드린 기도의 주제였다.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져 고통 받는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기도를 시작한 것이었다.
몇 년 뒤 독일 통일의 불씨가 됐던 바로 그 기도모임이다. 시작은 이처럼 미약했다. 그러나 6년 뒤 그들이 기도한 대로 베를린 장벽이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바흐의 도시로 유명한 이 작은 도시의 니콜라이교회 제단 위에는 ‘평화의 천사’ 그림이 그려져 있고, 교회의 기둥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장식도 있다.
1982년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면서 동독 내부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점점 거세져 갔다. 이에 독일 청년들은 매주 월요일마다 이 평화의 제단 위에서 통일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예배가 끝나면 저녁 6시부터 1시간 동안 교회주변을 조용히 걷는 무언의 시위를 이어갔다. 이들의 기도모임이 알려지면서 라이프치히에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989년 가을, 경찰은 모여드는 시위 인파를 통제하기 위해 도시 곳곳을 봉쇄했다. 특히 ‘평화의 기도’ 시간에는 시민들의 통행이 금지될 정도였다. 동독 정부는 기도회를 중지시키기 위해 니콜라이교회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별히 ‘5.8 부정선거’ 이후 평화 시위의 움직임은 더 커졌다.
경찰은 매주 이 기도회에 참석하는 이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교회 안 2000석의 자리는 사람들로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시위대는 촛불을 들고 교회 주변을 둘러쌌고, 교회 창문에는 꽃을 꽂았다. 시민들의 기도물결을 타고 통일과 자유를 외치던 이들의 구호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들의 평화적인 기도와 시위는 드레스덴, 할레, 동베를린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11월 9일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니콜라이교회 안내문에는 당시 ‘평화혁명’을 요약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촛불을 들려면 두 손이 필요했다.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 바람을 가려야 하기 때문이다. 촛불을 쥔 손으로는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 수 없었다”
통일이 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니콜라이교회에서는 아직도 평화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모임은 실업문제, 빈곤퇴치 등 다양한 주제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은 통일을 이뤘지만,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도모임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몇몇의 적은 숫자로 시작한 작은 불꽃같았던 이 모임은 곧 큰 역사의 불길을 일으켰다. 핍박과 고통이 있었지만, 중단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행한 기도모임이었다. 시민들이 함께 참여했고, 감동을 받은 성도들이 전국에서 모여든 기도모임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목적을 가진 기도모임이었다. 이 기도의 불길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동독에 평화와 자유를 갖게 했고, 통일을 이뤘다.
“그것은 겨자씨만큼이나 작게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정기적인 기도로 헌신한 이 작은 사역을 하나님께서 이토록 크게 사용하실지 그 누구도 몰랐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강력한 공산주의 체제를 붕괴시킨 평화혁명이며, 성경적 방법이 낳은 기적이었다”
니콜라이교회의 퓌러 목사가 자서전 발간 당시 한국의 독자에게 보낸 인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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