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봉원영 교수 주제발표문
페이지 정보
정리 - 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7.05.29 06:03
글씨크기
본문
선교적 교회의 이해와 재림교회적 적용
1. 선교적 교회의 출현
최근 들어 교회 안에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가 대세다. 이후천은 자신의 선교사적 연구를 토대로 한국교회 선교역사의 패러다임을 넷으로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교회선교 1.0시대는 1920년대 이후의 시대로 초창기 기독교의 한국교회 정착시기를 의미하며, 한국교회의 양적성장을 이끄는데 이론적 배경이 되었던 교회성장론이 교회선교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던 1970-80년대 이후까지를 교회선교 2.0시대, 1990년대 이후에 급속도로 교회 안에 퍼진 교회건강론의 시기는 교회선교 3.0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2003년 이후부터 한국교회에 소개된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church)의 시기를 교회선교 4.0의 시대로 명명하면서, 지금의 시대가 선교적 교회론의 시대임을 주장했다.
학자마다 그 시기적 구분에 약간씩은 차이가 있으나 이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음으로 이후천의 이러한 구분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선교적 교회는 유형(有形)의 건물로서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말 선교적 상황과 형편에 대한 선교신학자들의 자기 반성적 성찰에서 시작된 학문적 이론이며 동시에 운동(movement)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학자들에 따라서는 선교적 교회, 선교적 교회론, 선교적 교회운동 등을 혼용하여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선교적 교회로 통일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사실 선교적 교회는 이전에 강력한 기독교 체제를 이루며 전 세계로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나라들이 20세기에 이르러 급격한 세속화의 영향으로 교회가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오히려 선교지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을 직면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Lesslie Newbigin 이후로, 서구문화의 이러한 탈기독교화와 다원주의 환경에서 교회가 어떻게 선교적 만남을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선교학자들 간에 깊이 있는 토론을 이끌어 내었고 그 결과로서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을 분명히 담아 등장한 것이 선교적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1990년대의 이 시기에 교회가 이처럼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에는 당시에 출현한 시대적인 사조의 영향이 컸다.
이 시기는 근대주의(Modernism)에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으로 넘어가던 시기로서, 순수학문 분야와 건축분야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중문화 속으로 파고들어 패션, 음악, TV, 영화, 연극, 예술, 그래픽 아트, 문학 등에도 등장하였다. 그리고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표준적 사고로 자리 잡아 세상, 인간의 성(性), 종교, 영적 영역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변화를 일으켰고 교회는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소산과 대면하게 되었다.
다원주의적 영향 아래에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종교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정의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종교적 신념과 정체성의 약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보화 시대, 포스트모던적인 사고, 세계화와 더불어 종교다원주의의 급진적이고 총체적인 영향력이 역사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교회의 전통적인 역할을 점령해 버린 채, 교회는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말았다.
현재 영국 인구의 70퍼센트가 교회 예배에 참석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예배 형태나 교회의 모습을 어떻게 바꾼다 하더라도 그들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는 상황이다. 호주의 교회도 영국처럼 젊은 세대를 잃어가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해마다 3500개가 넘는 교회가 문을 닫으며, 나머지 교회들 중 80-85퍼센트는 출석률이 정체되거나 줄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가 정체성을 잃은 채, 교회의 다양한 선교적 노력이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전혀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이러한 위기에서 잃어버린 정체성과 공신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 모임과 전도적 프로그램을 어떻게 개발해야 할 것인지를 논의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별개로 하고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정직한 반성과 새로운 시도의 필요성에서 선교적 교회가 등장했던 것이다.
학문적 분야에서는 GOCN(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에 참여한 Darrell Guder, George Hunsberger, Alan J. Roxburgh, Craig Van Gelder 등 여섯 명의 신학자들을 통해서, 1998년에 출판된 선교적 교회를 시작으로 하여 북미를 중심으로 선교적 교회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선교적 교회에 대해 다양하게 논의되었던 주제들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선교적 교회의 발견, 선교적 교회의 활용, 선교적 교회의 참여, 선교적 교회의 확장이 그것이다.
국내에서도 2003년에 처음으로 선교적 교회가 소개된 이후로 다양한 논문과 서적들이 번역되었으며, 교회의 현장에서 선교적 교회 이론을 접목하려는 시도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 가운데 이후천이 몇 편의 연구를 통하여 주로 북미의 선교적 교회를 평가하면서 한국적인 선교적 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으며, 한국일은 지역사회에서 선교적 교회의 효과적 역할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2. 선교적 교회의 특징
Michael Frost와 Alan Hirsch는 다양한 선교적 교회들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들을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근접공간, 공동 프로젝트, 영리 사업, 그리고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그것이다.
선교적 교회에서 근접공간은 기독교인과 미(未)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만나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장소나 행사를 뜻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친구, 이웃, 누구든지 그곳에 나타난 사람들과 함께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사회학자인 Ray Oldenburg는 이것을 ‘세 번째 장소(a third place)’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첫 번째 장소는 가정이고, 두 번째 장소는 일터, 세 번째 장소는 사회 속에 존재하는 공동체 생활의 근저가 되는 곳으로 상호 관계를 통해 모든 유익이 발생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번째 장소의 특징으로는 사회적 결속력이 있으며, 인간관계에 다양한 인간접촉을 증진하고 공동체 의식을 창출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공공의 삶의 민주주의를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선교적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기독 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속한 지역공동체가 함께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개발을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선교적 교회는 마땅히 문화적 유연성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장소나 시간으로 교회의 경계를 고정시키지 말아야 하며, 지역사회에 공동체적 문화를 제안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공동체의 리더들과 환경적 문제를 논의하기도 하고,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공정무역 교실을 운영하며, 다양한 지역단체들과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일 등에 선교적 교회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기독교인이 어느 지역 공동체에서 미(未)기독교인들과 협력하여 본질적으로 가치 있고 유용한 활동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예술적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가 없는 지역사회에서 문화교실을 열고 미술이나 발레, 악기 등을 가르치거나 방과후 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은 교회적 차원에서 지역사회와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속한다. 특별히 방과후학교의 경우, 구청에서 시설허가와 더불어 운영을 위탁하여 시설 보완비를 지원하고, 지역사회 공헌을 계획하는 영리회사 등에서 교사를 지원받아 운영하는 것으로 지역사회와의 소통이 전제가 될 때 가능한 방식이다.
세 번째 특징은 영리 사업이다. 선교적 교회는 지역 공동체 안에 세워지는 서비스 산업의 가치를 크게 여긴다. 지역사회에서 진행되는 교회의 잘 준비된 영리 사업은 기독교 기반을 둔 프로그램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과도 의미 있고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해준다. 그리고 지역사회에게 유익한 사업을 통해 지역사회의 필요를 채워줄 뿐만 아니라, 그 사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확보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선교적 교회의 네 번째 특징은 자생으로 생겨난 영적 공동체이다. 선교적 교회는 자유주의 교회들이 주장하는 지역 개발에 대한 관심과 복음주의 운동이 주장하는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변화의 욕구를 함께 엮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Turner는 자신의 책에서 공동체의 개념을 보다 더 자세히 묘사하면서 사회적 함께함(social togetherness)과 사회적 소속(social belonging)에 대한 집약적 감정을 암시하는 ‘코뮤니타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감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 바깥지역에서 함께 생활하도록 하는 종교적 의례들과 연관을 맺고 있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은 사회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Hirsch는 그것을 ‘목적에 대한 원대한 의식’이 해당 공동체에 녹아져 있는 공동체라고 표현한다.
이 기독교 공동체(코뮤니타스)는 운동(movement)과 함께함(togetherness)의 경험을 포함하기 때문에 내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사회 외부에 존재하는 사회적 함께함이 있고, 사회를 진보하도록 자극을 주며, 제한성을 경험하고, 당장 직면한 일에 초점을 맞춘다.
앞서 열거한 선교적 교회의 네 가지 특징은 선교적 교회가 기존의 전통교회가 진행해 왔던 지역사회에서의 봉사의 수준을 넘어서 지역사회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사역을 실천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교회중심적인 전통적 선교이해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공존하는 통전적 선교를 지향함을 알 수 있다.
3. 선교적 교회의 공헌 및 한계
선교적 교회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별한 결과를 낳았다. 첫째로, 선교적 교회가 가지는 신학적 유연함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의 해석에 있어서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진영을 통전시킴으로 두 진영의 대화를 이끌어 냈다. 둘째, 선교적 교회는 그동안 교회가 주로 전도/선교적 측면에서 지역사회에 접근했던 것과는 달리, 지역사회를 교회가 놓여 있는 삶의 터전으로 인식하고 지역공동체가 접하고 있는 현안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고민하며 참여하도록 그 실천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셋째, 선교적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다. 지금까지 서구교회는 선교하는 나라, 그 외 제3세계 국가들은 선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피선교지로 인식되었으나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예외 없이 선교적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기에 교회가 위치한 지역사회와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인식은 곧 교회가 지역공동체와의 적극적 대화를 시도하게 했으며 지역사회의 문화를 수용하고 기독교 사회적 기업과 같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도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선교적 교회가 역사적으로 출현하게 된 이유와 그 발전적 과정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이것이 출현한 지 오래된 것은 아니어서 이에 대한 구체적 성과와 평가를 완전히 내리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현재 한국에서 선교적 교회의 정신을 시도하는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북미의 시대적 상황에서 등장했던 선교적 교회가 한국적인 배경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증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적 교회가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사람과 지역사회를 가치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긍정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4. 한국적 상황에서의 선교적 교회에 대한 지표
선교적 교회론이 한국의 선교신학계에 소개된 이후, 이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온 이후천은 그의 다양한 연구를 토대로 한국적 상황에서의 선교적 교회에 대한 지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신학에 입각한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이어야 한다.
⑵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이어야 한다.
⑶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민과 지역 공동체 발전에 성과가 있어야 한다.
⑷ 교회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어야 한다.
⑸ 생활과 생명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⑹ 10년 이상 교회가 내적 갈등 없이 유지되어야 한다.
⑺ 세계선교에도 기여해야 한다.
⑻ 목회자와 평신도의 계층적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⑼ 상황성은 지역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시대에 대한 분석도 포함되어야 한다.
⑽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야 한다.
⑾ 에큐메니칼적이어야 한다.
⑿ 실질적인 지역민의 교회여야 한다. 이후천, “한국에서 선교적 교회의 사례와 그 기준지표에 대한 고찰” 159-160.
한국일 역시 한국의 지역사회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의 선교적 교회론을 실천하는 교회들을 선정하여 그 중에서 여덟 가지의 특징을 발견했다.
⑴ 신학적 기초: 신학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근거하여 복음적이며 에큐메니칼적 신학의 통합과 균형을 이룬다.
⑵ 지역 사회와의 관계: 지역 사회를 전도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으로 인식하고 관계를 맺는다.
⑶ 필요성의 원칙: 지역 교회는 지역 사회의 필요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접촉함으로 삼아 지역 사회 안에 선교적 교회를 실현하게 된다.
⑷ 지역 교회의 목표: 지역을 하나님 나라로
⑸ 선교적 교회의 동력: 교회는 지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자원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⑹ 선교적 교회 구조: 교회 조직을 교회 안에서 일을 행하는 내부적 구조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선교적 구조로 전환한다.
⑺ 평신도 신학: 성도가 지역 교회와 사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며 파송한다.
⑻ 목회자 리더십: 목회자의 선교적 목회 리더십
II. 선교적 교회의 재림교회적 적용
1. 두 선교적 모델
재림교회 신약학자이면서 선교에 대한 교회의 책임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Jon Paulien은 자신의 책 Everlasting Gospel Ever-changing World에서 예수의 비유를 통해 포스트모던 시대에 재림교회가 지향해야 할 두 개의 선교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1) 요새모델(fortress model)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쉽게 보이고 매혹적인 요소가 가득한 곳이다. 그래서 도시는 항상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도시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런데 Paulien은 도시의 이러한 성격을 교회의 선교사역의 하나로 보면서 요새모델(fortress model)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실 이것은 지금까지 전형적인 재림교회의 선교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갈릴리 바다 주변에 불 켜진 도시는 마치 밤에 고기 잡는 사람들을 위한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재림교회도 역시 사회 속에서 예언적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 왔다. 요새 도시(fortress city)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밖에서부터의 위험을 보호받는다. 그러므로 요새 안은 안전함을 특징으로 한다.
때때로 몇 명의 사람들이 요새 밖을 나가 요새를 둘러싼 적들을 포로로 붙잡아 들이기도 하지만, 성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나 성 안으로 포로로 잡혀 들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성 밖의 사람들에 비하면 항상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가 이러한 방식으로 선교에 참여할 때에 전도적인 결과는 분명히 발생한다. 그러나 성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 밖의 사람들을 접촉하거나 성 밖으로 나가도록 요구 받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밖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2) 소금모델(salt model)
지금까지 재림교회는 요새모델에 주로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하나만이 아닌 또 다른 사역을 말씀하셨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소금은 음식에 섞이고 그 안에 절여진다. 그 결과로 소금은 전체에 영향을 미쳐서 음식의 맛이 좋아지게 만든다. 조용하게 스며드는 사역이다. 이것을 우리는 소금모델(salt model)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소금사역모델의 대표적인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19-23).
지금까지 요새모델을 통해 어떤 특정한 사람들(people groups)에게는 성공적인 결과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소금모델은 요새모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3) 두 가지 모델의 실례들
성경에서 이 두 모델의 실례들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사도바울과 야고보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이 되었다고 고백했다(고전 9:19-23). 소금모델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남아 사람들과 함께 요새를 지켰다. 분명한 요새모델이다. 그는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 안에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있다고 자랑했는데, 야고보는 바울이 하는 일에 대하여 항상 편하지 않은 마음을 가졌던 것처럼 보인다(행 21:17-21, 갈 2:1-10).
둘째로, 예수님과 침례요한의 사역에서도 이 두 모델이 발견되어진다. 침례요한은 광야에서 살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가까이 오지 않으면 그의 설교를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기본배경에서 사역하셨다. 그분은 가버나움에도 사셨고, 사람들과 섞이셨다. 도시에서 도시로 다니셨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대중적으로 만나셨다. 지금까지 설명된 두 가지 모델을 정리하여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표1. 성경의 두 가지 모델
▲ 요새모델(Fortress Model):
요새 안의 사람들에게 더 안전
지금까지의 재림교회 사역 방식
전도의 효과성에 있어서는 제한적임
Christian Modernism에 적합한 모델
미국, 유럽, 호주의 이민자 문화에 적합
▲ 소금모델(Salt Model):
더 많은 사람들을 접촉 가능
현 시대에 보다 적합한 방식
Radical Conservatism
사도 바울, 예수 그리스도, 에녹, 요셉, 다니엘, 에스더
세속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에 적합한 모델
이 두 가지 사역모델에 있어서 핵심은 우리에게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세속적인 사람들에 맞는 전도만을 하도록 부르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야고보나 침례요한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요새모델 사역도 하도록 부르셨다. 사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우리 재림교회가 지향해오던 사역의 방식이다. 이것은 분명 좋은 것이고 동시에 성공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접근방식을 다양하게 하고 넓혀야 하는 필요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시도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1840년대에 재림운동이 막 시작되었을 때, 그 재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전의 그 재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초기 개척자들은 그들의 접근방식을 넓혀서 William Miller의 기별을 전혀 들어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미국 안에서의 외국어(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르심을 느꼈다. 마침내는 John. N. Andrews가 유럽으로 선교사로 떠났고,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Ellen G. White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더 편안한 상황에서 벗어나 복음을 들고 문화나 풍습, 때로는 언어까지도 전혀 다른 도전을 제공하는 먼 곳에까지 달려갔던 예를 보여준다.
(4) Radical Conservative Salt Ministry Model
이것을 급진적 보수주의(radical conservatism)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radical(급진적인)이라는 말은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것’, ‘세속적인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 서로 섞이는 것’,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는 일에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강조한다. 영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conservative(보수적인)는 ‘하나님께서 재림신자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충실함’,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의 신에 충실함’,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전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함’을 의미한다. 세속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게 하는 견고한 어떤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Radical Conservatism에서 radical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한 방법과 관련한 것이고, Conservative는 그 전도의 과정에서 우리의 믿음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Jon Paulien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교회의 효과적 소금사역 모델로서 아홉 가지를 제안하는데 처음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공중전도 방식에서 관계전도로(from public to relational evangelism), 2) 단기간에서 비교적 긴 기간으로(from short term to long term), 3) 우리의 아젠다에서 사람들의 필요 채움으로(from our agenda to felt needs)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원칙은 그리 급진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중전도의 가장 실제적인 형태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커다란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도 강한 반대나 거부감 없이 비교적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전도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기에 대단히 어려울 수도 있다.
4) 교회중심에서 이웃중심 혹은 직장중심으로(from church based to neighborhood/workplace based)
5) 한 가지 방식에서 다양한 접근방식으로(from one way to a multiplicity of approaches)
6) 결과 중심에서 과정 중심으로(from a conversion to a process focus)
두 번째 세 가지 원칙(4-6)은 처음 세 가지 원칙(1-3)보다는 보다 더 도전적이지만 다음에 다룰 또 다른 세 가지 원칙(7-9)보다는 덜 도전적이다. 어쩌면 교회가 다음의 세 가지는 옵션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의 세 가지 원칙 속에서 지금까지 교회가 새로운 세대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가장 기본적인 이유들을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7) 교회에서 지역사회로(from church to community)
8) 교회 주도에서 하나님의 주도로(from church controlled to God controlled)
9) 배타적 입장에서 수용적 입장으로(from exclusive to inclusive)
지금까지 열거한 아홉 가지 원칙들은 오늘날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세속적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기본적 전략들이다. 소금사역(the salt ministry)은 전근대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잘 통하는 접근방식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것이면서도 매우 필요한 것이다. 교회로서, 우리는 더욱 유연해 져야 하며 바울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더불어 발전시켰던 신학적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갈 2:1-10).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같은 접근 방식을 통해서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은 선교에 있어서 서로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히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하나님의 메시지의 핵심에 동의했다. 그들 사이에서 달랐던 것은 그들이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말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2. 선교적 교회의 재림교회적 적용을 위한 제안
첫째로, 교회는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목회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는 변화하는 것이 대단히 민감하며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변화를 입고 먹으며 마신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변화에서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반항적인(defiant) 기관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는 변화의 필요성을 알고, 소통의 과정을 이해하며, 새로운 세대들을 향한 효과적인 접근방식을 연구함으로 복음을 충실하게 실천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 것인가? Alan Roxburgh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목회자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변화의 구체적 방법이나 방향을 설정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올바른 그리스도인 가치를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문화를 배우는 학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새로운 세대들과의 소통을 통하여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는 선교적 수단으로써 문화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북미의 많은 교회들이 가파른 쇠락의 길을 경험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함으로 여전히 성장하는 몇 교회들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장하는 교회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전통적인 신학과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수용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들의 관심은 현재의 문화 안에서 어떻게 깊은 영성을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의무적인 믿음 구조를 가진 근본주의(fundamentalisms)가 몰락하는 대신 새로운 종교들, 즉 실용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 요소를 가지면서 세속주의 안에서 영성을 제공하는 종교들이 부흥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Leonard Sweet은 자신의 책 Postmodern Pilgrims에서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의 21세기 목회적 대안으로 EPIC 모델을 제시했는데, EPIC교회란 경험(Experience), 참여(Participatory), 이미지(Image-Driven), 그리고 관계(Connected) 중심의 교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선교적 교회의 사역은 문화에 대해서 적대적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문화에 기독교적 영성을 입혀 새로운 세대들과 소통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성을 경험하게 하며, 그 가치를 소유하게 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 역시 안디옥에서 그곳이 자신의 선교사역에서 가장 좋은 일터임을 깨닫고 “학식과 지혜와 열성으로 그 문화적인 도시의 주민들과 그곳을 자주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힘 있는 감화를 끼쳤”다. 왜냐하면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 작품, 문학 그리고 종교에 정통함을 드러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력할 때에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접촉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지성적인 그들의 개인적 노력에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선교적 교회의 효과적 사역은 교회의 내부적 사역과 외부적 사역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 이루어진다. Reggie McNeal은 선교적 전환을 분석하면서 선교적 교회는 내부적 사역에서 외부적 사역으로 그 초점이 옮겨간다고 했지만, David Bosch나 Charles Van Engen과 같은 학자들은 교회의 내부사역과 외부사역 사이의 바른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내부에 초점을 맞춘 교회는 그 조직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에 우선적 목표를 둔다. 지도자들은 출석, 예산, 새로운 프로그램, 장비 등 그들이 설정해 놓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한다. 불행하게도 많은 지도자들은 교회의 산업적 기준에 근거해 거대한 조직을 이루는 데 자신의 모든 리더십을 소비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과정이 있고, 목표한 일들이 무리 없이 진행된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건강한 교회를 결정짓는 척도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예배, 교육, 개인적 헌신은 외적인 집중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내적 요소”라는 교훈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넷째로, 선교적 교회의 실현은 교회가 지역공동체를 섬기고 성도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될 때 현실화 되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처럼, 세상을 향한 거룩한 섬김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재정과 조직적 에너지를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성도들은 지역사회의 선교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지역사회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점검하고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세밀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고, 세상을 위한 선교사로서 지역 공동체를 섬기는 사역이 활발해질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의 특징은 공중 설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방법만으로는 접촉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수고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으며 가정에서 친밀히 교제하는 기회를 이용하였다.
제자들은 영혼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만민에게 은혜의 초청을 전해야 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기별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가가야 하였다.
인성을 쓰신 예수님께서는 주린 자들을 먹이셨고, 아픈 자들을 고치셨으며, 그 땅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역을 행해야만 한다. 지상생애 동안 구주께서는 왕래가 잦은 주요 도로를 따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셨다.
또한 다음의 예수의 선교 방법은 선교적 교회의 전형적인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을 인도할 때에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으로만 참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진정으로 바라시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개인적으로 노력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설교하는 데 시간을 더욱 적게 쓰고 개인적으로 봉사하는 데 시간을 더욱 많이 썼더라면 더욱 위대한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다.”
다섯째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Kingdom perspective)을 통해 사역과 선교를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분점, 중요한 도구, 예견하는 표증이며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일차적인 장소”로서 선교하는 백성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분리된 객체가 아니다. 교회는 한 형제요, 한자매요, 한 가족이다. 주님의 지상 명령을 함께 수행하는 지체들로서 우주적 공동체의 한 몸을 이룬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통해 교회들은 그 선교적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협력하는 유기체적 사역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Michael Frost는 교회는 마치 영화의 예고편과 같다고 비유했다.
그래서 마치 잘 만들어진 영화예고편을 보고 사람들이 “나는 이 영화를 꼭 보고 말거야.” 라고 말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교회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나는 이 교회가 말하는 천국을 꼭 경험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말로 천국이 완전함과 공정함의 장소라면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다가올 그 정의와 완전함을 미리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다가올 천국이 정말로 사랑과 자비의 장소라면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유와 사랑, 자비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III. 결론
이제 마지막으로 선교적 교회와 관련된 몇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로, 선교적 교회는 교회론을 약화시키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교회란 문자적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복음을 위하여 세상을 향해 불러냄을 받은 모든 사람이 곧 교회다. 그것은 단체 혹은 그룹일 수도 있고 개인일 수도 있다.
선교적 교회가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개인으로서의 교회 개념을 중시하여 성육신적 교회론(Incarnational ecclesiology)에 입각하여 일상의 삶에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선교적 교회가 교회론을 약화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선교적 교회는 그것이 그룹으로서의 교회이든, 개인으로서의 교회이든 교회적 의미를 더욱 충실하게 강조하며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는 과연 방법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정신을 이야기하는가? 선교적 교회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교회가 사람들의 삶과 관심의 변두리로 밀려나서 어떠한 선교적 노력도 통하지 않는 이 시대에, 어떤 획기적인 선교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있는가? 아니면 원래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셨던 그 처음의 계획을 회복하려는 것인가?
선교적 교회론은 단순한 프로그램이나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direction)이고 운동(movement)이다. 프레임의 전환이다. 선교적 교회는 단순히 교회 생명(church life)의 한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누가 교회이고, 그것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며, 무엇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이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 성장과 교회 건강이라는 개념 위에 세워졌지만 각각으로부터 배웠던 교훈들을-세상 끝에까지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선교 현장에서-오로지 선교를 중심으로 결합시킨다.
선교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은 우리 교회에게 좋은 것을 넘어 지구적인 동시에 지역적으로 선교적 결단들을 내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선교적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할 때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을 우리가 부름받은 상황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어느 정도는 교회로 하여금 구체적인 문화에 도달하도록 최선의 모양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선교적 교회만이 정답인가? 아니면 또 다른 대안이 있는가? 선교적 교회는 정형화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한국교회의 선교적 르네상스를 위해서는 그 원리와 함께 모델이 절실함을 기억해야 한다. 선교적 교회는 어떤 하나의 형상으로 정형화될 수 없다. 지역을 섬기고 새로운 세대를 섬기는 사역은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더욱 역동적인 유연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선교적 교회의 원리에 입각해 사역을 실행하는 다양한 지역교회의 모델들이 요청된다. 또한, 한국의 선교적 교회는 서구교회가 지향하는 지역 중심적 선교 모델과 함께, 열방과 세계를 향한 열정과 헌신을 고취하는 사역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결국 온전한 선교의 종착점은 세상 끝까지 주의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사명에 동참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주의적이든, 포스트모던주의적이든 세속적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실천하는 일에 가장 큰 도전은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들은 많은 경우에 어떤 외고집을 통한 반대가 아니라 타협할 수 없는 복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동기가 되어 반대하게 될 수 있다.
혁신적인 선교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기존의 전도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을 명확하지 않은 생각과 혼란한 실험으로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혁신적인 전도방식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방식에 어떤 두려움이나 의구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반면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트랙에서 선교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금사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덜 모험적인(보수적인) 동료들과 계속된 대화의 창을 열어놓고 다음의 두 가지를 그들에게 알게 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요새 전도모델을 추구하는 사람들처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사명과 기별에 대한 귀한 열정이 있다는 것, 그들은 요새 전도모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킬 수 있어야 한다. 소금 전도모델이나 요새 전도모델은 둘 다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세속적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요새 전도모델을 지원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특집
-
인공지능 시대, ‘목회자’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2024.10.24
-
인공지능 시대, ‘재림성도’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2024.10.24
최신뉴스
-
[인터뷰] 방글라데시연합회장 김원상 목사 2024.11.15
-
‘고3 수험생 위한 특별선물’ 필리핀 영어캠프 모집 2024.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