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 낭독’ 정재용 선생, 육성 테이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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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7.03.0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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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이화여고 초청강연 내용 ... 최근 고인 유품 정리하다
정재용 선생은 일제강점기이던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독립투사. 학생대표였던 그는 일경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인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해 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독립선언식 장소가 당초 예정됐던 파고다공원에서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갑자기 바뀌어 군중이 혼란에 빠지자 정재용 선생은 품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꺼내 힘차게 읽어 내려갔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그의 목소리를 타고 3.1운동의 불길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져갔다. 그러나 이 일로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한 후에는 의용단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연합뉴스>가 공개한 육성 테이프에는 선생이 1950년대 서울 이화여고에서 3·1운동과 관련해 강연했던 내용이 실려 있다. 가족들이 이사를 하면서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다 최근 발견한 이 테이프에는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과정 등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증언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특히 독립선언문을 일본 정부와 미국의 윌슨 대통령, 파리 강화회의까지 전달하려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정재용 선생은 이 강연에서 “(일제의)압박을 당하니 이제는 우리 민족이 자주 독립해야 살지 그러지 아니하면 우리 민족은 아주 멸절되고 말거다. ... ... 처음에는 청원서라고 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 다음에는 우리가 조선독립을, 그 다음에는 민족주의 자결을 주창한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전하는…”
친손자 정성화 장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민족대표가 아니었던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며 “누가 나와서 읽을 것이다 하고 기다리던 차에 할아버지는 한 시간 전에 동기들하고 가셨다가 (독립선언서)한 장을 갖고 계시다가 읽으신 것”이라며 운명 같은 순간을 소개했다.
언론은 “선생의 공개적인 외침은 이후 학생과 민중 시위로 연결되면서 독립운동의 신호탄이 됐다”고 전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당시 감리교 해주읍교회 전도사였던 정재용 선생은 훗날 아들인 정사영 박사(전 서울위생병원장)의 전도로 세천사의 기별을 받아들이고 재림교인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도 모두 재림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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