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육보건대, 의료선교 역사에 기틀 다진 전인교육 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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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6.04.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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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재림신앙과 민족정신으로 뿌리 깊은 정체성 다져
이후 일제의 탄압과 한국전쟁 등 숱한 민족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전인적 간호 전문인력을 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볼 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나라 안팎이 크게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위기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학교를 마치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구름기둥처럼 시시때때로 인도하셨다.
삼육보건대학교의 발걸음은 한국 재림교회 의료선교의 역사이자 대한민국 근현대사 보건의료교육 체계와 궤를 같이한다.
삼육보건대의 이야기는 1936년 개교보다 30여 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 한반도에 재림기별이 전해진 이듬해인 1905년 11월 W. R. 스미스 목사 부부가 이 땅을 밟는다. 간호사 출신이었던 부인 에디 사모는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주민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그것이 한국 재림교회 의료선교의 태동이었다.
그러나 1년 후 간호사인 엄마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목사의 어린 딸은 20개월의 어린 나이에 디프테리아에 감염돼 죽고 만다. 이에 이들은 대총회에 선교의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당시의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민들의 집에 이틀 묵었을 때, 벼룩과 이, 빈대가 득실거려 온 몸은 반점 투성이였고, 제대로 걷기조차 어려웠다. 콜레라는 네 시간 이내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었고, 세균성 아메바 이질이 많은 인명을 해쳤다. 한때는 300가구 정도 되는 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장티푸스를 옮겨 마을사람 전원이 감염되고, 그 중 절반 이상 사망했다”
한국 의료선교의 촉발점이 된 스미스 목사는 20년 동안 이 땅에 머물며 봉사했다. 하루 30~40Km 이동은 보통이었다. 사나흘 동안 320Km의 거기를 왕복한 적도 있다고 한다. 호랑이나 표범을 피해 나무 위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온종일 폭풍우 속을 헤쳐 구도자를 방문했다. 너무 피곤하면 자전거를 타면서도 쪽잠을 자고, 길가에서 노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 어린 두 자녀를 잃었다. 생명을 누리는 동안 신뢰와 희망을 갖고 한국인들을 위해 헌신한 그는 자기 연민의 시간 따위는 갖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살았다. 그렇게 한국을 위해 숭고하게 봉사한 그는 온갖 병든 몸으로 귀국하여 네 번의 큰 수술과 네 번의 작은 수술을 받는다.
스미스 목사 부부의 요청으로 George Russel(한국명 노설) 박사가 1908년 가을 내한했다. 그는 140여년 된 초가집을 20달러에 구입해 4년간 2만 명의 환자를 치료했다.(워싱턴포스트지 기사 인용). 노설 의사의 봉사 초기 이석관 장로와 그의 둘째 사위인 김창세 박사 등 한국인 직원 2명이 그의 사역을 도와 일했다. 김창세 박사의 첫째 사위가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그는 훗날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을 수료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보건학 박사가 된 인물이다.
노설 박사 역시 한국에서 봉사하는 동안 두 아들을 순안의 석박산 기슭에 묻었다. 한국에서 얻은 병 때문에 미국에 돌아가서도 한 아들과 부인까지 목숨을 잃고 만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조지워싱턴대학 동창이었다. 노년에 가끔 서신을 교환했을 만큼 친분이 두터웠다. 류제한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가 된 것은 (뒤에 언급하지만)상해위생병원에서의 재림교단과의 인연과 노설 박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간호사양성소 설립에 대한 논의는 이미 1908년 순안에서 조선대회가 조직되던 때부터 있었다. 에반스 장로는 속히 이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대총회에 보고했다. 그리고 1913년 가을 전세계 안식일학교 헌금의 초과액인 7000달러가 한국 의료사업에 지원되어 순안병원을 증축할 수 있었다.
1926년 원륜상(Ralph. S. Watt) 목사와 간호사인 원명륜(Mildred Watt) 사모 부부가 내한하고, 드디어 1929년 5월 류제한 박사가 순안병원에 합류하면서 병원 발전과 더불어 간호학교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이 이뤄진다.
원명륜 사모는 “장래를 내다볼 때 우리는 우리의 의료본부와 간호학교가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날의 준비를 위해 우리는 중국 상해에 있는 재림교회 간호학교에 젊은 남녀들을 보내 간호학을 공부하도록 결정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중국 재림교회와 의료기관의 위상은 대단했다. 특히 밀러 박사는 장개석 총통의 주치의로 활동할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중국에 있는 동안 상해, 북경, 봉천, 광동, 홍콩 등 곳곳에 위생병원을 지어 의료선교 사업을 펼쳤다.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의 일대기에 자주 등장하는 ‘상해 홍십자병원’의 정식 명칭이 바로 상해위생병원이다.
김구 선생과 신익희 선생을 비롯해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박사 그리고 안태국, 문일만 등 독립운동가와 평안북도 선천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끌며 항일의열 활동으로 일제의 심장을 서늘하게 한 여성교육의 큰 별 차경신 여사, 피천득 등 당대 문인들이 상해위생병원을 자주 이용했다. 이처럼 재림교회는 독립투사들의 지치고 아픈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주는 안전한 울타리였다.
역사에 따르면 재림교회는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음양으로 지원활동을 펼쳤다. 최초의 한국인 목사 이근억과 한국 교회의 선구자 임기반 선생은 교회를 중심으로 해외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다. 남삼리교회 창설자인 최형진은 안창호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후원했으며, 하와이 재림교회 창립자인 정영옥 여사 역시 흥사단을 지원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에게 윤봉길 의사를 인도해 준 사람이 당시 시조사 직원 이흑룡 선생이었다. 3.1 만세운동의 촉발점이 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 선생이 재림교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정재용 선생은 삼육보건대의 3대 학장이자 과거 위생병원장을 역임한 정사영 박사의 부친이다.
한편, 한국 재림교회는 서울에 병원과 간호학교를 세우려는 계획 아래 1929년부터 1932년까지 김유순, 채덕삼을 시작으로 상해위생병원에 대여섯 차례 간호학생들을 전략적으로 유학 보낸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또 다른 순백의 전설이 시작된다. 재림교인 간호사의 삶이 당시 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작품의 원천이 되었던 것.
춘원 이광수의 권유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러 상해에 온 피천득은 그만 병이 나 상해위생병원에 입원한다. 안창호 선생의 권유였다. 피천득은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한국인 간호사를 만나 놀란다. 그녀가 바로 유명한 수필 <인연>의 세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순’이다.
“그는... 황해도 자기 고향 이야기도 하고, 선물로 받았다는 예쁜 성경도 빌려주었다. 자기는 ‘누가복음’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나에게 읽어 준 때도 있었다. ... ...”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피천득은 총알이 날아드는 위험한 길을 헤치고 병원을 찾아가 그녀에게 고국으로 같이 돌아가자고 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임으로나 인정으로나 환자들을 내버리고 혼자 갈 수는 없습니다”
한동안 머물며 간곡히 설득했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피천득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재림교인 간호사가 ‘유순’이다.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피천득은 춘원 이광수가 <흙>이라는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을 쉽게 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유순이라고 지으면 어떨까요?”라고 권유해 실제로 그의 이름이 채택됐다.
춘원 이광수 역시 상해위생병원에 출입하며 재림교회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특히 입원 당시 진료를 맡아 도와주던 재림교인 간호사의 경건함과 친절함에 매료됐다. 이때의 감동과 기억으로 그 간호사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키는데, 그녀가 바로 변절 이전 발표한 소설 <사랑>의 주인공 ‘석순옥’이다.
그는 작품에서 “순옥은 안식교의 선교사들의 청정하고 경건한 생활을 흠모하고 자랐거니와... 참으로 성경에 보던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던 때에 그 제자들이 하던 생활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라고 언급할 만큼 ‘순옥’을 신실하고 순수한 재림교인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로 자세하게 묘사했다.
1930년 상해로 파송된 간호학생 박근실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옥고를 치르며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도산을 단독 간호했다. 재림교인인 이석관의 장녀 이혜란과 선생의 백년가약을 성사시킨 게 의명학교 설립자인 근당 임기반이었다. 이들은 독립협회, 하와이에서의 민족계몽운동, 신민회 조직, 국채보상운동, 조선독립청년단 조직, 독립자금 모금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 펼쳤다.
1931년과 1934년 각각 상해로 갔던 노보신과 안귀분은 1960년대 간호사 최고의 영예인 적십자 나이팅게일 기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노보신은 후일 부산위생병원 간호부의 초석이 되고, 안귀분은 삼육간호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기틀 위에 드디어 1936년 4월 류제한 박사는 경성요양병원을 신축하고 삼육보건대학교의 전신인 간호사양성소를 개교한다. 일찍이 상해위생병원 간호학교에서 수학한 간호사들 중 여자 5명, 남자 3명 등 모두 8명이 교편을 잡았다. 초대 교장으로 수고한 길인애(Ernestine Gill)를 비롯해 삼육간호학교에서 봉사한 선교 간호사 대부분이 미혼으로 한국에 와 그들의 뜨거운 청춘을 바쳤다.
삼육보건대학교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박애정신에 터전을 세운 ‘진심의 대학’이다. 역사의 격동기에 한국에 뼈를 묻을 각오로 왔던 선배들의 봉사일념과 헌신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춘 희생의 불꽃이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지혜로 시대의 책임을 감당해 온 반석같은 존재다. 그것이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며 오롯이 선 ‘대한민국 간호교육의 산실’ 삼육보건대학교의 뿌리 깊은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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