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120주년 기념] 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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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리는 적어도 이 근방에서는 옛 제주도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마을입니다”
오조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강관규 장로(성산교회)의 말이다. 이곳 토박이인 까닭일까. 강 장로는 기자와 함께 마을을 가로질러 가며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저기 아기자기한 카페가 원래는 이 마을 000 씨 집이었어요”
“이 골목길을 쭉 따라가면 해변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이런저런 설화가 전해져요”
보통의 가이드에게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안내에 따라 제주 전통의 돌담길을 따라가자 눈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부복수 집사의 집이었다. 지난해 9월 제주대회 창립총회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98세의 고령에도 매일 성경을 읽고 암송한다. 피난교회의 기억도 여태 명징하고 또렷하게 품고 있다. 무엇보다 성산교회의 역사 곳곳에 부 집사의 손때가 오롯이 묻어 있다. 피난교회를 취재하는 데 그를 빼놓을 수 없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어 찾아오셨습니까?”
피난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부 집사는 아가리배가 성산항에 들어온 날부터 시작해 교회당을 짓던 일, 그 와중에도 전도회를 가졌던 일 등 성산포 피난생활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강 장로는 간혹 기자가 알아듣기 힘든 제주 방언이 등장하면 그 말을 풀어 설명해 주며 이해를 도왔다.
옛날이야기처럼 쏟아지는 부 집사의 말을 뒤로하고 기자는 꼭 듣고 싶었던 어느 지점의 사연을 캐물었다.
“그런데, 피난교회를 팔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부 집사와 강 장로 모두 잠시 말을 아꼈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은 강 장로였다.
“그때가 1989년이었습니다. 예배드릴 장소가 비좁으니 교회를 크게 다시 지어야 했죠. 하지만 성도들에게 돈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호남합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합회를 찾아갈 때 집사님도 함께 가셨지요?”
“그때는 내가 같이 가지 않았어요. 이후에도 몇 번 합회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저는 없었어요”
강 장로의 설명에 따르면, 성산교회를 짓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피난교회를 매각하는 쪽으로 합회의 지도를 받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최고의 금액에 피난교회를 팔기로 했다. 이를 결정한 이후에도 적절한 금액을 제시하는 사람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어떤 이는 5000만 원을, 어떤 이는 6000만 원을, 많게는 8000만 원까지 제시하는 이도 있었지만 충분치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근 마을 주민이며, 피난교회 성도들과도 교류가 잦은 강 모 씨를 만나게 됐다. 최근 부동산을 알아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그래서 피난교회의 매매가로 1억 원을 제시했다. 그런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그가 선뜻 거액에 매입하기로 한 것이다. 성도들도 모두 긍정적이었다. 그 뒤로 새 교회를 짓는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성산교회가 오조마을 입구(오조리 1031-7)에 위치하게 된 것은 부 집사가 847m²(231평)의 대지를 희사한 덕이다. 평생을 홀로 신앙하며 올곧게 살아온 부 집사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성산교회를 짓는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강 장로의 말에 부 집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1억 원에 피난교회를 매입한 강 씨는 교회를 개조해 현재까지도 식당으로 운영하고 있다. 혹자는 “역사적인 교회가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 식당이 됐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피난교회의 역사를 깨달은 성도들은 이후에도 교회를 되찾을 방법을 다방면으로 알아봤다. 하지만 그사이 피난교회의 공시지가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껑충 뛰어올랐다. 더구나 한때 교회 앞을 지나는 도로계획이 추진된 적이 있어 보상을 기대하는 심리 때문에 매매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도로계획은 사실상 죽은 계획이 됐음에도, 보상심리는 사그라들지 않은 모양이다.
“기자님, 우리 이야기 듣느라고 배가 많이 고플 터인데, 국수 한 그릇 하러 갑시다”
한평생을 교회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베풀며 살아온 부 집사다운 말씀이었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했지만 걷는 속도는 오히려 기자보다도 빨랐다. 공교롭게도 국수집은 피난교회처럼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석조건물이었다. 아마도 오래전에는 창고로 쓰인 듯했다. 석조건물을 보니 부 집사는 피난교회가 생각나는 모양이다. 자신의 국수를 한젓가락 크게 떠서 기자의 그릇에 올려주며 물었다.
“묵은 교회(피난교회)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렇다저렇다 말씀드리기 힘들었다. 부 집사를 댁에 모셔드리고 강 장로와 헤어지자, 기자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음 끝에 전화가 연결됐다.
“김재호 목사님, 성산포 피난교회 유적지화에 대해 여쭙고 싶은 내용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 이 기사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의 지원으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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