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선각자’ 류제한 박사 부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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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1.10.0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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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민에 남긴 숭고한 헌신의 발자국 뚜렷
류제한(George Henry Rue) 박사는 1899년 6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아버지 H. P. Rue와 어머니 E. F. Knight의 아들로 출생했다.
1921년 6월 메이 벨 에임스와 결혼한 후 1929년 5월 7일 대총회의 부름에 따라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순안병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한국에 온 지 7년 만에 부인 메이 벨 여사가 병을 얻어 1936년 12월 16일 사망했다. 메이 여사의 묘소는 지금도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있다.
미국으로 돌아간 류제한 박사는 1945년 10월 간호사였던 젤다 그레이스 레아 양과 재혼했다. 그녀와 결혼 당시 자신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의료선교활동을 할 것이라며 뚜렷한 약속과 다짐을 받았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1947년 4월 한국으로 돌아온 류제한 박사는 다시 병원장에 취임했으며 병원이름을 ‘서울위생병원’으로 바꾸었다. 19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주치의로 위촉되었다.
그는 전쟁의 와중에도 한국을 돕기 위해 많은 애를 쓴 사랑의 선각자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미국에 출장 중이었던 류제한 박사는 맥아더 사령관의 전세기편으로 귀국해 서울 수복 후 병원 복구와 부상자 치료에 전념했다. 특히 1951년 1월 15일 맥아더 사령부에 요청해 L.S.T(수송선)을 배치 받아 약 6,000명의 피난민을 제주도 성산포로 피난시켰다.
1954년 3월 대한민국 문화훈장(현 국민훈장 무궁화장) 및 대통령 감사장 받았으며, 로마린다대학교 의과대학으로부터 모범동문에 선정됐다. 한국과의 인연은 더욱 깊어져 1963년 10월 중앙대학교에서는 그에게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2년 뒤에는 수도의과대학(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66년 1월에는 서울특별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1967년 8월 3일 정년퇴임하고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워싱턴주 노들랜드에 여생을 보냈으며, 그해 가을 의료 및 구호봉사와 한-미 양국간 친선유대강화에 공헌한 공로로 국무총리 감사장을 받았다. 1993년 11월 18일 94세의 일기로 주 안에서 잠들었다.
그의 헌신적이고 숭고했던 삶은 그 어떤 묘사보다 생전 그가 남긴 단 두 마디의 말로 요약된다.
“나는 대통령을 진료할 때나 시골 아낙네를 진료할 때나 똑같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진료했습니다”
“나는 한국에 구경삼아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나의 뼈를 묻을 각오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리가 한국 백성을 해치러 온다면 도망가는 목자가 아니라 그 양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온 선교사였습니다”
류은혜 여사 ... 성육원 열어 전쟁고아에 새 삶 선물
부인 류은혜(Zilda Grace Rue) 여사는 1910년 7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서 아버지 Lewllyn Lea와 어머니 Nora Lea 사이에서 태어나 농장에서 자라났다.
1932년 대학 졸업 후 화이트매모리얼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1945년 10월 31일 류제한 박사와 결혼해 2년 후 남편을 따라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류제한 박사를 도와 병원 간호사로 봉사하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포성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13일 서울위생병원 600병동에 전쟁고아를 위한 고아원을 열고 운영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서울 상봉동에 건물을 구입하고 고아원 ‘성육원’의 문을 열어 오갈 데 없는 딱한 처지의 전쟁고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다. 초대원장으로 봉사하며 해외입양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여 미국 350여명, 노르웨이 250여명, 호주 및 스웨덴으로 전쟁고아들을 입양시켜 이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1955년부터 2년 동안 서울위생병원 부설 간호학교 교장으로 봉사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40명으로 시작된 간호학교는 지금의 삼육보건대학으로 발전했고, 이러한 교육사업을 통해 훌륭한 간호 전문인력이 사회로 배출되었다.
1963년 4월 보건사업 발전에 공헌한 공로로 보건사회부장관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으며, 1967년 7월 류제한 박사 은퇴와 함께 한국에서의 봉사를 마무리 짓고 영구 귀국했다.
남편이 숨진 뒤 2004년 11월 6일 한국선교 100주년기념식 및 류제한 박사 묘비 제막식에 한복을 입고 참석해 한국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으며, 2008년 9월 24일 서울위생병원 의료선교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한국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남겼다.
류제한 박사와의 사이에 자녀를 갖지 않고 평생 병원과 고아들을 위해 봉사했던 그녀는 2009년 7월 13일 캘리포니아주 파라다이스에서 재림의 소망을 안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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