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그루 소나무 같던 고 김관호 목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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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0.08.3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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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내현 목사 인도로 재림기별 ... 고령에도 매주 노인집회 설교
일제의 혹독한 강제통치가 극에 달하던 1945년 어느 날, 강원도 묵호의 한 허름한 여관방에서 반내현이란 낯선 사람에 의해 전해들은 이 한 마디는 20대 젊은 사원이었던 청년 김관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당시 조선방송협회 삼척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김관호 씨는 그날 경기도 가평 적목리라는 곳에서 온 반내현 씨로부터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세천사의 기별을 받아들였다. 마치 예수와 니고데모의 감람산 만남처럼 구속의 역사가 태동하는 역사적 현장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고 김관호 목사의 재림교인으로서의 삶은 질곡 많은 한국 재림교회의 현대 선교역사와 숨결을 같이한다.
그는 마치 척박한 황무지를 개간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발길이 닿는 곳곳에 복음의 밀알을 심었다.
그는 1947년 9월 30세의 늦은 나이로 조선합회 신학교에 입학해 1949년 조선합회 신학과 제1회 졸업(삼육대 신학과 12회)생으로 사역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약 10년 동안 남선대회와 영남대회에서 교역자로 봉사했으며, 1959년부터 은퇴하던 1982년까지 중한대회와 서중한합회에서 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6.25 전란 중이던 1951년에는 재단법인 대구 안식원을 설립해 오갈 데 없는 전쟁고아들을 손수 거두기도 했다. 이 기간 중 대구 안식원 초등학교를 세워 직접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52년 5월 5일에는 대구삼육초등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으로 봉사했다. 전 영남합회장 강명길 목사는 “목사님은 서울에 올라가신 후에도 학교가 어려울 때마다 기도와 거액의 헌금을 주셔서 오늘날 대구삼육초등학교가 이 지역 명문학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왔다”며 고인의 삶을 기렸다.
그는 이처럼 50년 넘는 목회인생 동안 영혼구원은 물론 교회와 각종 기관사업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했다.
1992년에는 경북 안동 풍산교회의 부지를 기증했고, 1993년에는 러시아 사할린삼육대학 창설 기금으로 1억 원을 선뜻 기탁했다. 1995년에는 중국 요녕성 심양에 혜광민족기술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았으며, 최근 완공한 삼육서울병원 생활의학연구소 건립에도 건축자금을 희사해 병원 발전을 도왔다.
고인은 1977년 우필원 목사, 김병목 장로 등과 함께 ‘재림교인 노인회’를 결성해 활동했으며, 1982년부터 4년간 은퇴목사들의 모임인 ‘성우회’를 이끌었다. 삼육대학교 동문회장을 7년간 역임하며 모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그는 지난 2006년 삼육대학교 100주년기념식에서 ‘자랑스러운 삼육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 김관호 목사는 특히 팔순이 넘은 고령에도 1997년 9월부터 대방교회 노인예배를 인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등 시들지 않는 선교열정을 몸소 보여주었다. 34명으로 시작된 집회는 매 안식일 참석자수가 증가해 두 달 만에 200여명으로 늘어나는 등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길’을 걸었다.
지난 29일 새벽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하기 까지 그는 자신의 설교대로 생애하고, 그 생애로써 설교들을 입증한 신앙의 거장이었다.
전 삼육대 총장 남대극 교수는 고인의 생전 설교집 발행사에서 “그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성경 말씀의 적용과 연장이고, 그의 눈길, 표정, 걸음걸이, 앉은 모습 그리고 헛기침까지도 우리에게는 교훈과 책망이요 격려와 위로”라고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이렇듯 늘 푸르고 성성한 한그루 소나무처럼 성도들의 재림신앙을 고취시키고, 식어진 신앙의 열을 회복해 복음사업을 위해 일어서도록 독려하던 ‘노장’은 이제 재림의 소망을 품고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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