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교과에는 나오지 않는 교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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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당신이오!”
누군가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잘못 행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손가락질 한다면 어떨까요?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굳이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 것이 미덕인 이 사회에서, 성경은 너무 자주 그 반대로 행동합니다.
다윗 왕 앞에 선 선지자 나단이 그러했듯, 에베소서 2장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허물을 들춰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진노의 자녀였다고, 욕심껏 살며 이기적이었다고. 거기에 더해 우리는 사실상 아무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외부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번 끄집어 드러내는데 멈추지 않고, 기억하라고 합니다. 2장11절에는 원어 므네모뉴오(μνημονεύω)를 “생각하라”고 번역했지만, 이는 “기억하라”에 더 가까운 단어입니다. ‘생각한다’면 한순간 깨닫고서 잊을 수 있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는 순간 그 행동의 일회성이 철회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처절한 과거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 숙제가 되지요.
신앙적 열심이 고양되면 흔히 우리의 과거는 정서적으로 잊힙니다. 그런 상태일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그러다가 영적으로 넘어지면서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교만과 절망을 오고 가는 것이 그리도 쉽지요. 자신의 과거를 잊어버리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이유 또한 사라집니다. 매일을 살게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임을 생각지 못하고, 오늘의 필요에 대한 가시적인 기적과 간섭에 의존해 하루살이 신앙을 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사도는, 우리가 스스로의 과거를 잊어버림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기에 마땅한 존재라고 착각하지 말도록 권고합니다.
그런데 과거를 기억하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또 다른 극단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나의 부정적인 과거를 되짚다가 거기에 압도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했지’ ‘왜 그런 선택과 행동을 했지’ 하다가 후회로 밤잠을 설칠 수 있습니다. 어두운 먹구름이 마음을 뒤덮으며, 우울감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양단의 기로에 서게 될 때, 에베소서가 기록된 방식을 보십시오. 2장이 마치 1장과 완전히 동떨어진 듯이 보이지만, 원문을 통해 이 둘의 긴밀한 연결성을 볼 수 있습니다. 2장1절을 시작하는 “너희는”이 역할은 주어로 쓰이지만, 문법적으로는 목적격 형태를 취합니다. 이는 2장1절의 “너희”가 1장에서 언급되는 “너희”에 대해 부연설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1장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가 올려졌는데, 그 가운데 언급된 “우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2장에서 논설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1장에서 독자에 대한 호의로운 내용에 익숙해진 우리는 2장에서 “사실은 너희는 그런 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어!”라는 반전을 극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어둠 속에 두는 것은 에베소서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못된 과거를 들추기 이전에, 에베소서 1장은 그러한 우리를 아시면서도 구원을 예정하신 그분의 은혜를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로마서 5장6~10절 참조). 또한 2장 초반에서 우리의 실체를 가리키며 따갑게 이룬 반전은 몇 절 뒤 또 다른 반전을 맞이합니다.
2장1~3절은 하나님이 없는 때에 인간의 처절한 처지를 상기시켰으나, 4절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재창조됐음을 선언합니다.
같은 구조가 11절부터 나오는 내용에서도 반복됩니다. 11절은 과거에 우리가 외인이었음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제 와 앞으로(13, 19절 참조) 우리의 신분과 목적은 온전히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창조물입니다. 우리의 기초는 허물어질 인간이나 세상 권세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우리는 과거의 허물이 생각날 때 이 확신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3장12절, 로마서 8장 참조)
우리는 에베소서 뒷부분을 넘어가기 앞서 반드시 1장과 2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장도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그리고 인간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다른 말로는 신론(神論), 인간론, 그리고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이 부분을 재차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진리이기도 하지만 그로부터 실제적 삶이 꼴지워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앞의 내용을 잊으면, 4~6장에 나오는 생활에 대한 세부 지침은 싫은 잔소리 같이 들릴 수 있습니다. 순종하고 복종하며, 선을 위해 노력하라는 말들은 내 노력으로 구원받는가 하는 율법주의와 혼동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창조의 목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기초로 할 때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생활의 원동력이 되며, 순종이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재림교회 기본교리도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28개 교리가 6개의 대주제 항목으로 정리되는데 신론, 인간론, 그리고 구원론 이후에 교회론, 생활론과 종말론으로 이어집니다. 교리 체계를 이해하면, 이러한 순서가 까닭 없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말씀을 통해 믿는 대상을 알고, 그 가운데서 인간의 본질과 구원의 기별을 접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를 기초로 교회의 구성과 개인적 삶에 대한 이해를 세우는 것입니다.
한편, 에베소서나 기본교리에서 인간론보다 신론을 먼저 논한다는 점은 이들을 세속 철학과 구분시킵니다. 인간이 누구인가를 먼저 혹은 오롯이 논할 때는 정처없이 여러 지점을 떠돌며 다양한 대답을 듣는 것과 같으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만물에 관한 우리의 이해의 확실한 기초 돌이 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하게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2장에서 바울이 독자들의 죄인됨을 언급하는 이유가 반드시 에베소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2장1절로 이어지는 이전 문장의 시작점, 1장15절을 보십시오. 1장15~22절이 한 문장이지만 번역상으로는 분절되어 있으므로 감사와 기도문이 별개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7절로부터 나오는 기도문은, 15절에서 언급하듯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문제가 있어서 이러한 기원의 내용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고 있기 때문에 꾸준히, 더 잘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는 것이지요. 흔히들 신앙에 문제가 있어야 조언할 것이 있고, 신앙을 잘하는 사람들에게는 칭찬만 하면 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점차 넓어져야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 생활은 점차 성장하는 것이므로, 성도들에게 멈추지 말고 계속 향상하도록 권고하는 것이지요. 이를 볼 때, 주마가편(走馬加鞭), 즉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는 것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바울의 가르침이 사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무언가 다르다고 느끼십니까? 현대에 인기를 얻으며 진행되고 있는 신학 논점 중 하나는 바울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직접 예수님께 배운 제자들과 달리 바울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을 잘 알지 못했으며, 도리어 예수님께서 의도치 않으신 내용을 설파하면서 현재의 그리스도교를 탄생시켰다는 것이 주요 골자입니다.
에베소서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을 진하게 반향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1장13에 나오는 ‘약속의 성령’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예수님과 연결해 여러 차례 강조하는데,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에서 온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의 첫 마디는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성령은 회개로 이끄는 요한의 침례와 다른 예수님의 침례의 필연적 동반자였지요. 그러한 까닭에 성령, 혹은 영적인 대쟁투에 대한 강조가 에베소서 내에서 더 의미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지혜와 계시의 영”(에베소서 1장17절)이라는 표현은 진리의 성령을 약속하시는 요한복음 16장13절을 떠올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도 특히 요한복음 15~17장과 상통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으나 기뻐하며 도리어 자신을 위해 염려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북돋는 것도 산상수훈 등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이를 볼 때,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았음이 분명하며, 비록 똑같이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말로 소화해 표현하고, 다방면에서 그의 삶에 적용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 구절을 기억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바울처럼 자신의 말과 삶에 다양하게 배어 나올 정도로 되새기고 적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것이 성령을 통해 우리 삶에 이뤄지는 참된 성경 번역입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방법은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 번역은 내 삶으로 성경을 직접 번역하는 것이다”(R. A. 토레이) 당신의 삶이 당신의 친구가 읽을 유일한 성경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께서 은혜로 주신 삶의 목적을 이루고 있습니까? 오늘 나의 삶은 잘 된 성경 번역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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