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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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전령
남아프리카의 재림교회 선교 유산
“아름다워라. 기쁜 소식을 가지고 산을 넘어오는 사람이여…구원을 선포하는 사람이여”(사 52:7, 쉬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 J. N. 앤드루스가 최초의 공식 해외 선교사로 유럽에 파송된 지 올해로 150년이 지났다. 그렇다고 해외 선교가 1874년에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 앞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윌리엄 헌트라는 새로 회심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현지의 선교 사업을 위해 길을 닦았다.
헌트는 광맥을 탐사하는 광산업자였고 영국 웨일스에 태어나 캐나다로,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주해 1856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1869년에 그는 교회를 비판하는 신문을 읽다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를 처음 알게 되었다. 헌트는 J. N. 러프버러와 연락했고 서신을 통해 재림교회 서적과 기타 자료를 구입했다.
네바다주 골드힐에서 금을 채굴할 때 헌트는 캘리포니아 블룸필드으로 찾아가 러프버러가 1870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끄는 전도회에 2주 동안 참석했다. 그는 재림 기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다. 재림교회의 간행물이면 무엇이든 관심을 보였고 러프버러 개인의 전도 차트 및 엘렌 화잇의 『교회증언』을 포함해 여러 서적을 구입하고 『리뷰 앤드 헤럴드』도 구독했다.1
몇 주 뒤 그는 남아프리카 킴벌리의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이동했다. 뉴질랜드와 호주를 경유해 목적지에는 1871년에 도착했고. 재림교회 인쇄물을 많이 가져갔다. 인쇄물을 전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미국에 새로운 자료를 주문했다. 1878년 어느 무렵 헌트는 웨슬리안 감리교 속회장인 H. C. 윌슨의 손에 재림교회 인쇄물을 쥐어 주었다. 윌슨은 『리뷰 앤드 헤럴드』에 편지해 자신과 아내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 개종했고 다른 여러 사람에게도 기별을 전해 그들 역시 신자가 되었다고 말했다.2
사업의 확장
1885년경 헌트의 영향과는 별개로 화란개혁교 신자인 헤오르헤 J. 반 드루텐과 페터르 J. D. 베설스가 제칠일 안식일 준수자가 되었다. 어느 안식일 오후, 자신들의 결정을 따르고 있는 헤오르헤와 그의 아내 마리 반 드루텐은 헌트의 판잣집을 지나다가 그가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성경을 읽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헌트를 만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미국에 안식일 준수자가 3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885년 말 드루텐은 헌트에게 페터르 베설스를 소개했다.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은 헌트에게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할 네덜란드인 선교사 파송을 미국에 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거금 50파운드를 동봉했다. 1886년 대총회 총회에서 G. I. 버틀러는 깜짝 놀라며 연설했다. “보십시오. 먼 나라에서 알지도 못하는 분들이 자기들을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해 달라며 엄청난 돈을 보내왔습니다.”3 이 ‘마게도냐의 호소’를 듣고 총회 대표들은 모두 일어나 영광의 찬송을 불렀다.
이듬해인 1887년 C. L. 보이드와 D. A. 로빈슨이 가족 및 4명의 성경 사역자와 문서 전도자를 데리고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 도착해 사역을 시작했다. 1887년이 지나기 전에 킴벌리에 신자 21명으로 비컨스필드 재림교회가 조직됐다.4 1890년에는 교회당을 지었다. 이 교회는 남아프리카에서(아마도 아프리카 대륙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재림교회로 남아 있다. 이 교회는 1967년에 남아프리카 국립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현재는 지방 기념물로 분류됐다.
1894년 10월 S. N. 해스컬이 남아프리카에 두 번째로 도착해 재림교회 사업을 확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5 개인 전도 사역에 집중한 그는 세라 펙을 교사로 비컨스필드 학교를 세웠고 ‘빅홀’ 다이아몬드 광산 동쪽에는 ‘광부를 위한 킴벌리 대중탕 및 자선 협회’라는 건강 시설도 설립했다. 헤오르헤 반 드루텐 역시 ‘빅홀’ 북쪽에 상점을 운영했다. 원주민 선교도 시작했다. 새로 시작한 교회와 갖가지 사역으로 지역 주민들의 관심이 커졌고 사업은 확장됐다.
원주민 지도자 배출
리처드 모코는 최초의 아프리카 원주민 회심자로 1892~95년 어느 시점에 킴벌리에서 입교했다. 가이카 부족 최고 족장 가문의 후예인 그는 최초의 원주민 선교사이자 안수목사가 되었다. 모코 목사는 유능한 복음 전도자요 설교자로 현지 언어는 물론 영어와 네덜란드어에도 능통했다. 그의 희생적 사역으로 수많은 원주민이 회심했다. 그는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긴 뒤 1932년 1월 7일에 잠들었다.6
엘렌 화잇은 남아프리카 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보이드와 로빈슨 선교사 일행은 1887년 여름 남아프리카로 가는 길에 노르웨이 모스에서 엘렌 화잇과 합류했다. 베설스 가족은 1889년 배틀크리크에 방문했을 때 그녀를 알게 되었다. 1890~1908년에 엘렌 화잇은 베설스 가족 여러 명에게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또 화잇은 남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기별도 많이 받았다. 하나님은 이 중요한 선교지와 그 사업의 지도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다.7
초기의 역사적 장소들
2023년, 재림교회 유적지 사역 행정부장인 마르쿠스 구츠슈바흐는 화잇유산관리소 부소장인 마이클 소쿠파와 협력해 남아프리카 킴벌리 외곽 두토이스판 공동묘지에서 표식이 없는 윌리엄 헌트의 무덤을 찾아냈다. 묘지는 웨셀턴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던 곳에서 가깝다. 남아프리카 교회는 아프리카 최초의 재림교인 개척자였던 헌트의 역할을 기리는 묘비를 곧 제작할 예정이다. 비컨스필드 교회 재건 계획도 세웠다.
이 역사적 장소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상기시킨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재림교인은 1천만 명이 넘는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찬양한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45:4).
1 J. N. Loughborough, “California,” Review and Herald, February 7, 1871, 62; J. N. Loughborough, “The Church, Present Truth on the Pacific Coast XXVIII,” Pacific Union Recorder, August 9, 1908, 1
2 J. H. C. Wilson, “A Letter from Africa,” Review and Herald, June 6, 1878, 183
3 G. I. Butler, “Important Plans and Issues Contemplated by the General Conference,” Review and Herald, December 7, 1886, 760
4 C. L. Boyd, “Sabbath-Keepers in Africa,” Review and Herald, October 11, 1887, 634
5 S. N. Haskell, “The Work in Africa,” Bible Echo, January 1888, 12
6 J. L Robison, “The Passing of Richard Moko,” Review and Herald, April 7, 1932, 331; 다음도 참조할 것. M. E. Olsen, A History of the Origin and Progress of Seventh-day Adventists (Takoma Park: Review and Herald, 1925), 488
7 참조. Ellen G. White, Testimonies to Southern Africa (Washington, D.C.: Ellen G. White Estate, 1974); Ellen G. White manuscript release 491, The Ellen G. White Africa Collection (Washington, D.C.: Ellen G. White Estate, 1976)
멀린 D. 버트 대총회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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