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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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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4년 12월호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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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고 반영하는 삶

충만한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고 반영하는 삶


필리라 자피타


인터뷰 중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설교해야 할 주제를 한 가지만 선택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어요?” 눈물을 글썽이며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하나님의 은혜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은혜예요.”

수년 전이라면 은혜가 이렇게 빠르게 떠오르는 대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나의 신앙 여정에서 은혜가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했다.


나의 여정

내 이름은 필리라이며 율법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여정으로 인도하셨을 때 나는 이미 바울의 로마서로 삶이 바뀌었다. 이 변화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다.

나는 아서 맥스웰의 『재미있는 성경 이야기』를 읽으며 자란 3대째 재림교인이다. 엄마의 할아버지는 재림교 목사였고, 아빠는 재림교 목사인 삼촌 밑에서 자랐다. 나의 부모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자 예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우리 집 거실의 중앙에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예수님의 슬픈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희생적인 죽음에 관한 진리는 우리 가운데 살아 움직였다. 주방에 걸린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라는 글귀가 적힌 액자를 보며 식사 때마다 예수님을 떠올렸다. 그 글귀가 너무 좋아 매일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 글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리스도를 나의 사랑하는 동반자와 친구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말할 때 조심해! 예수님이 듣고 계셔!”라고 말하며 나를 감시하는 분으로 여겼다. 어릴 때부터 대체로 나의 어린 마음은 하나님께 이끌렸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다.

나는 수년에 걸쳐 많은 성경 지식을 쌓았음에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배타적이고, 비난과 비판을 서슴지 않고, 독선적인 태도를 지닌 채 율법주의의 세계로 이끌렸다. 그렇다고 내가 끔찍한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자주 ‘이렇게 훌륭한 재림 청년인 나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실까!’라고 생각하곤 했다. 

나의 독선에 대해 그리고 신념과 행동이 모든 면에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부족한 인간으로 여기며 정죄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 하나님은 서서히 제동을 거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은혜의 깨달음이 하나씩 일어나던 중 케냐의 배러턴대학 출신의 재림교 목사이자 학자인 어느 분이 우리 교회에서 일주일 동안 로마서를 강연했을 때 은혜의 깨달음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시작부터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게 됩니다.” 이미 성인이었던 나는 그동안 키워 온 냉소적인 태도로 반응하며 남편에게 “뻔한 이야기겠지. 무슨 새로운 말씀을 하시겠어?”라고 속삭였다. 하나님께서 내 신학의 근본을 흔들 준비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말이다.

그 주가 끝날 무렵 은혜라는 놀라운 실체를 점진적으로 알아가는 새로운 장이 나의 신앙 여정에 열렸다. 그 후 몇 달 동안 나는 울며불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어떻게 이걸 놓쳐 버렸던 걸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활용했던 일부 교회 문헌과 해석의 관점은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 해도 ‘하나님은 자비롭고 그대를 열렬히 사랑하신다’는 성경의 외침을 가려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그분이 너를 사랑하실 거야. 네가 그분의 은혜를 받을 만큼 충분하지 않으면 그분은 너를 거부하실 거야!’라고 외쳤다. 율법은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결실이고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증거이지 그분께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찌 됐든 나는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경험으로 눈이 뜨였고 새로운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중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안전하며 구원의 보증도 얻었다. 그동안은 내가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거짓을 믿고 살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나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성과주의의 삶에서 은혜로 노선을 바꾸었다. 나는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한 평생의 과정을 시작했다. 하나님과 나 자신, 다른 사람들과 교회 그리고 이 세상에 관해 오랫동안 믿어 왔던 수많은 거짓을 하나님께서 벗겨 주시는 기쁨 속에서 나는 배우고 지워 버리고 다시 새롭게 배우는 중이다.

둘째, 나는 요한복음 13-17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고별 설교의 핵심에 이끌렸다. 행위 중심의 영성에서 관계 중심의 영성으로 바뀌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연합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의 본질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연약한 내면의 삶과 마주하며, 나의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충만함에 의지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율법주의는 나도 모르게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나는 충분히 선하지 않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느낌에 갇혀 있게 했다. 그런 나를 예수님은 용서, 소망, 수용, 존중, 안전함, 존엄함으로 채우기 시작하셨다.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만 하면 그분이 나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신다는 확신이 생겼고(요일 1:9), 그분께서 내 안에 시작하신 선한 일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빌 1:6).


예상치 못한 결과 

나의 본모습을 감지하기 어려웠던 율법주의적 종교에서 관계 중심의 영성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일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끼친 영향 외에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중 하나는 ‘잘못하는’ 사람을 매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안에 일으키신 것이다. 말이나 침묵, 행동이나 무반응으로 돌팔매질당하는 모든 죄인(롬 3:23, 24)과 내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은 나의 독선과 배타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느끼지 못했었다. 타락하고 망가진 세상에 살며 복잡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그분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하셨다. 무의식적으로라도 멀리하고 피하고 선을 그어야 할 사람들이라고만 알고 있던 이들과 전혀 다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너무 관대하고 죄를 묵인한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여긴다. 내 마음이 사람들의 결점 너머를 보고, 삶의 모든 깨어짐 속에 가려진 그들의 소중한 가치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똑같이 필요하며, 이 놀라운 선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셔서 우리가 받듯이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한다.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라는 말로 자주 번역되는 히브리어 명사 ‘켄’과 그리스어 ‘카리스’는 ‘호의’, ‘매력’, ‘기쁨’, ‘친절’, ‘즐거움’이라는 말과 관계 있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 주기를 좋아하시므로 기꺼이 힘써 그들에게 다가가신다.’는 뜻을 담고 있다.1 요한은 예수님에 관해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이것은 세상에 부어진 하나님의 무한하고 넓고 값없고 온전한 관대함이다.       


은혜에 대한 반감과 ‘무관용’의 문제 

필립 얀시가 언급했듯 ‘비은혜(ungrace)’로 가득한 세상에서는2 아무 공로 없이 무언가를 받는다는 개념은 상상도 할 수 없고 터무니없으며 불쾌하게 들리기도 한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행위가 필요하다는 관념과 종교가 넓게 퍼져 있는 문화 속에서는 수여자가 모든 것을 다 바쳐 선물을 마련한 뒤 수혜자에게 값없이 준다는 개념은 어이없고 불가능한 것이다. 성과 중심의 사고방식은 많은 문화와 종교에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치하하고 보상하는 반면 그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벌하는 시스템 속에도 그것은 작용하고 있다.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이런 사고와 행동 방식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값없는 은혜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이것이 삶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 9).

‘비은혜’의 사례는 개인에서 조직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다. 일부 사람들은 ‘비은혜’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이들에게서 더욱 일상적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에서 볼 수 있듯 일단 하나님이 무언가를 승인하거나 명령하셨다고 믿으면 은유적으로든 문자 그대로든 증오에 기초한 분열과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열정을 정당한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신학자는 은혜가 세상에 베풀어진 기독교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비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나타나든지 이는 역설적으로 은혜가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성경에서는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참된 상태에 대해 착각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렘 17:9). 이 성경 구절들과 다른 많은 구절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문제가 단순한 행동 수정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은혜와 의로움만이 영적 교만, 비판적인 태도, 분노, 불관용 그리고 어떻게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등 일상에서 겪는 내적·외적 싸움을 충분히 속죄할 수 있다.


은혜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에 간단히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자 성령의 임재와 능력으로 가득했던 예수가 이 땅에서 어떻게 지내셨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사복음서가 각각 다른 신앙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기에 그 강조점이 저마다 다르다는 데 학자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사복음서는 공히 예수의 사랑을 강조하며 그 방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같다. 그분의 사랑은 근본적이고 포용적이고 파격적이었으며, 추방되고 소외되고 배척당한 이들을 자기 울타리로 끌어들였다(마 9:10-13; 막 2:15-17; 눅 7:36-50; 요 4:4-42).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있을 때 편안했다. 예수가 오늘날 이해되는 개념으로서의 ‘정치’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의 혁명적인 삶은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예수께서 당시 종교·정치적 제도권 세력과 어떻게 마찰을 빚고 있는지 보라. 결국 그 때문에 그분은 죽임을 당했다. 복음서에 나타난 이런 반문화적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인격화된 것이다. 사복음서를 통틀어 예수는 실수 많고 발버둥치고 배척받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분을 완전히 잘못 드러낸 이들을 가장 호되게 책망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관계보다 규정, 자비보다 도덕적 요구, 사랑 넘치는 공동체보다 비판적이고 배타적인 공동체를 우선시하며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시켰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알고 경험해야 할 치유의 하나님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고 그분의 품은 넉넉하다.


이 은혜를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내가 은혜를 깨닫게 된 과정을 소개했다. 그 여정에서 내 삶이 변화됐고 존엄성을 얻었고 깊숙이 자리 잡은 수치심이 사라졌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안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지식, 이해, 경험이 깊어질수록 은혜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율법적이고 배타적이고 비판적으로 날을 세우는, 과거의 나 같은 사람들을 접할 때 그 모습을 좀처럼 참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갖가지 무서운 고난, 불공평, 조직적인 압제, 고통, 절망, 가난, 죄악에 가슴이 미어지지만 한편으로는 버리고 지우고 다시 배우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는 이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는 은혜가 내게 필요함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계속해서 은혜를 받고 또 베푸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현재 나는 조직적인 억압과 사회 부조리에 맞서서 특별히 온전한 삶을 주시는 성령의 관점에서 목소리를 높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바람직한 방식으로 서로를 대하며 살도록 내게 열정의 불을 일으킨 그 성령께서는 나와 의견이 완전히 다른 이들에게도 은혜를 베풀라고 명하신다. 은혜란 비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성경의 강력한 예언 메시지가 존재할 수 없고, 예수께서 당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언적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은혜란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열심히 할 뿐 아니라 폭넓고 포괄적인 사랑을 촉진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증오를 지속하는 권력과 제도 아래 갈수록 양극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사랑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그리스도처럼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충만함,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드높이며 굳게 붙잡게 될 것이다. 그러면 행여 실패하더라도 우리 행위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얻어 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용서와 회복이 아득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 넘치고 은혜롭고 넉넉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회개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모두를 기꺼이 용서하신다. 은혜를 얻어 내려는 불가능한 목표를 좇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은혜 중심의 관점을 일평생 구현하기로 나는 선택했다.




1 Word Studies, https: biblehub.com/Greek/5485.htm  

2 Philip Yancey, What’s so Amazing About Grace? Revised and Updated (Zondervan, Grand Rapids: MI, 2023).


필리라 자피타 런던 킹스 칼리지 조직신학 박사 학위 과정을 밟으며 동 대학원의 조교이자 뉴볼드대학에서 초빙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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